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강민혁은 오늘도 사무실 창밖을 내다봤다. 회색빛 빌딩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숨 막히는 빌딩, 지루한 서류 더미, 그리고 얄팍한 월급 봉투. 그의 30년 인생은 단 한 번도 ‘모험’이라는 단어와 어울린 적이 없었다. 어릴 적 무협지 속 주인공들처럼 세상을 유람하며 협객의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퍽퍽한 월세와 상사의 잔소리뿐이었다.

퇴근길, 습관처럼 들른 낡은 골동품 가게. 먼지 쌓인 진열대 구석에서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짙은 나무 빛깔의 작은 패였다. 거칠게 조각된 문양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주인아저씨는 먼지를 털어주며 껄껄 웃었다. “아이고, 총각. 이건 그냥 나무 조각이야. 재수가 좋으면 잠꼬대 정도는 시켜주려나.” 민혁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낡은 지갑을 열었다. 고작 만 원. 편의점 커피 세 잔 값이었다.

집에 돌아와 낡은 패를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으로 거친 표면을 쓸어보니 오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착각이겠지.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문득 패를 쥐어보았다. 나무 조각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적이 흐르던 방 안에 섬뜩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마치 온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빛의 폭풍이 방 안을 집어삼켰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몸은 마치 거대한 손에 붙들려 흔들리는 인형처럼 제멋대로 나부꼈다. 시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어지러움, 살갗을 찢는 듯한 바람,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민혁을 덮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낡은 패를 더욱 움켜쥐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이, 지금은 마치 뜨거운 불덩이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동안, 의식은 아득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

고요했다.
방금 전의 아비규환은 꿈이었나.
강민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귓가에는 매미 소리가 맴돌았다.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대신, 왠지 모를 위화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의 자취방이 아니었다.

그가 누워있던 곳은 나무로 된 평상이었다. 흙벽으로 지어진 낡은 방. 창밖으로는 빽빽한 빌딩 대신, 거대한 산세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공기는 맑고 청량했다. 믿을 수 없는 풍경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 여기가 어디지…?”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혼란스러움에 방을 나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를 더욱 경악케 했다. 널찍한 마당에는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들이 줄지어 있었고, 마당 한편에는 훈련이라도 하는 듯 젊은이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현대가 아니었다. 갓을 쓴 노인, 비단옷을 입은 여인, 무명옷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마치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그는 문득 손안을 살폈다. 낡은 나무 패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왼쪽 손등에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렴풋이 보았던, 패에 새겨져 있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그때, 저편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보시오! 도련님, 이제야 일어나셨소? 대사형께서 새벽부터 찾으셨는데.”

민혁은 돌아보았다. 앳된 얼굴의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그의 옷차림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혁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얇은 무명옷. 어제 입고 잠들었던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가 아니었다.

“내가 도련님이라고? 누구…세요?” 민혁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도련님! 어제 그 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더니,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겠소? 저는 사동입니다! 사동!” 소년은 다급히 외쳤다. “소문에 어제 도련님께서 현무봉에서 떨어지셨다던데… 괜찮으신 겁니까?”

현무봉? 사동? 떨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뺨을 꼬집어도 아팠고, 눈앞의 풍경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시간 여행. 무협지에서나 보던 그 시간 여행이라는 말인가?

“저, 저기… 그, 그제는 몇 년도입니까?” 민혁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었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연호라니요? 지금은 광명 원년이오. 도련님 정말 괜찮으신 겐가요?”

광명 원년? 민혁은 현대 한국에서 사용되는 연호가 아님을 직감했다. 확실했다. 그는 과거로 왔다. 그것도 무협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무림으로.

“사동아, 도련님은 어떠하시냐?”

이번에는 좀 더 묵직하고 나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리가 굽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한 노인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약탕기가 들려 있었다.
“아이고, 장로님! 도련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허나 어제 일로 기억이 좀 오락가락하시는 듯합니다!” 사동이 다급히 외쳤다.

노인은 민혁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민혁은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에서 꿰뚫리는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후음… 현무봉에서 그리 떨어지고도 큰 상처 없이 살아남다니, 하늘이 도왔구나. 허나 제자는, 기억을 잃은 듯하구나.” 노인은 혀를 쯧쯧 차며 민혁에게 약탕기를 내밀었다. “일단 이 약을 마시거라. 기혈을 보하고 정신을 맑게 해줄 터이니.”

민혁은 얼떨결에 약탕기를 받아 들었다. 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로님… 제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민혁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누구냐니. 강호에 이름을 떨치던 명문 정파, 청풍문의 제자 강민혁이 아니더냐. 헌데 어찌 그새 기억을 잃었단 말이냐.”

강민혁? 그의 이름은 맞았지만, ‘청풍문의 제자’라는 말은 생소했다.
“그리고… 지금 청풍문에는 비상이 걸렸다.” 노인의 목소리에 갑자기 엄중함이 서렸다. “알고 있느냐? 천하제일 무도회가 열릴 때가 다가왔다.”

천하제일 무도회!
민혁은 그 말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무협지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그 대회!
“천하제일 무도회라니요… 그게 무슨….”

“이리도 둔할 수가! 강호의 모든 문파들이 목숨을 걸고 겨루는 대회가 아니더냐! 이번 무도회는 다르다. 정파와 사파, 마교와 사문까지, 천하의 모든 세력이 참가한다더구나. 대륙의 패권을 결정할, 진정한 의미의 천하제일 무도회가 될 것이다.” 노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우리는 이번 대회에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청풍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자리이니. 네 사형들은 모두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너 또한 기억을 되찾으면 곧장 훈련에 합류해야 할 터.”

천하의 운명.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
민혁은 손에 든 약탕기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무림 고수라고?”

노인은 피식 웃었다. “네가 비록 청풍문에서는 어설픈 재능에 속했지만, 강호에 나가면 한가락 하는 제자다. 너무 자신을 낮추지 마라. 어서 약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 할 터. 무도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한 달?
강민혁은 혼란스러웠다. 어제까지 월급을 걱정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오늘은 무림 고수들의 운명을 건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청풍문의 제자라니. 게다가 기억 상실이라니. 이 무슨 황당한 전개란 말인가.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산세와 훈련에 매진하는 무인들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낯선 세계, 낯선 임무, 그리고 낯선 자신.
강민혁은 쓴 약을 한숨에 들이켰다.
이곳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가 꿈꾸던 모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대감과 함께.
그는 무림의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현대인 강민혁은 사라지고, 청풍문의 제자 강민혁이 새로운 운명을 마주할 차례였다.
무림의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오래된 운명의 재회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