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뼈대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바람은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를 몰고 다니며 폐허가 된 도시를 휩쓸었다. 진은 허름한 방수포를 뒤집어쓴 채, 간신히 버티고 선 상점 간판 아래 몸을 웅크렸다. 비상식량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그의 몸은 잔뜩 말라 있었지만, 그을린 피부 아래로 솟아난 근육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의 눈빛은 메마른 사막 같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 하나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복수. 오직 그 단 하나의 단어가 그를 살게 했다.
“형… 형은 괜찮을 거야.”
아직 따뜻했던 어제의 기억이 기침처럼 터져 나왔다. 그와 현은 함께였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이 열리고 나서부터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현은 영리하고, 재치가 넘쳤다. 진은 강했고, 끈기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완벽한 짝이었다. 폐허 속에서 발견한 낡은 라디오를 고쳐 밤마다 희망 없는 노래를 들었고, 쥐를 잡아 구워 먹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현은 늘 말했다. “진아, 우리는 끝까지 함께야. 무슨 일이 있어도.” 진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세상의 전부였다.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난 것은, 그 겨울의 벙커였다.
북풍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독한 계절이었다. 식량은 바닥났고, 눈보라 속에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헤매던 중이었다. 낡은 지하 벙커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희망에 부풀었다. 벙커는 예상보다 깊었고, 오래된 방사능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절박했다. 추위와 굶주림이 죽음보다 더 무서웠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침과 구토가 쏟아졌다. 낡은 방사능 차폐 시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은 지독한 오한과 설사에 시달렸다. 진은 현을 부축해 가장 깊숙한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적처럼 방사능 해독제를 발견했다. 딱 한 병. 그것만 있다면 현은 살 수 있었다.
“현아, 이거 마셔! 이걸 마시면 살 수 있어!”
진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해독제를 건넸다. 현은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약병을 움켜쥐었다. 그때, 벙커의 천장에서 굉음이 울렸다.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우리는 좁은 통로를 통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진이 먼저였다. 진은 뒤쳐진 현을 밀어 올리다 낡은 철근 더미에 깔려버렸다. 그의 다리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흐읍… 현아! 먼저 가! 난… 난 괜찮아! 빨리 빠져나가야 해!”
진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현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진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는 해독제가 들려 있었다. 천장이 더 크게 흔들리며 먼지와 잔해가 쏟아졌다. 틈새로 보이는 희미한 빛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현은 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것은 연민이 아니었다. 명백한 공포. 그리고 선택.
“진아… 미안해. 난… 난 살아야 해.”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 망설임은 없었다. 현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해독제는 그의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진은 손을 뻗었다. 그의 눈에 현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담겼다. 그 속에는 절규가, 배신감이,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지는 끔찍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현아! 가지 마! 이… 이러지 마! 현아아아아!”
진의 목소리는 굉음과 함께 묻혔다. 이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어둠과 차가운 잔해만이 그를 덮쳤다. 죽음이 그를 감싸는 듯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았다. 찢어진 다리와 엉망이 된 몸으로, 그는 기어 나왔다. 마치 흙 속에서 솟아난 악귀처럼. 살아야 했다. 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에게 이 고통을 돌려주기 위해서.
이후 2년의 세월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폐허 속에서 사냥하고, 약탈하고, 다른 생존자 집단과 싸웠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의 정신은 강철 같았다. 그는 현의 흔적을 쫓았다. 현은 똑똑했고,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 어딘가에 정착했을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문이 들려왔다. 서쪽 폐교회에 요새를 만든 ‘거래상’에 대한 이야기. 그는 귀한 물품들을 거래하고, 주변 생존자들을 거느린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히어로’. 정의로운 척 행세하는 위선자.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진은 확신했다. 그건 현이었다.
진은 며칠 밤낮을 걸어 폐교회 요새 근처에 도착했다. 높은 벽과 망루, 무장한 경비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은 꽤 크게 성공한 모양이었다. 진은 복잡한 배수관을 통해 밤중에 잠입했다. 그의 움직임은 고요했고, 그림자보다 어두웠다.
요새 안은 예상보다 활기찼다. 작은 시장이 열려 있었고, 사람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아 웃고 떠들었다. 풍요로워 보였다. 진은 낡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시장 구석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가 있는 곳은 시장 한복판의 높은 단상 위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깨끗한 옷,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 현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설득력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영웅인 것처럼.
“우리는 함께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도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역겨운 위선이었다. 진은 숨을 죽였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 위선자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현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낱 거지나 떠돌이일 뿐이었다. 현은 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수염과 상처, 그리고 너무나 깊어진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은 현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일과 동선을 파악했다. 현은 매일 밤, 요새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지하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개인적인 창고 같았다.
며칠 후, 진은 현이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녹슨 철문이 닫히자, 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현은 선반 위에 놓인 낡은 상자를 열고 있었다. 그 순간, 진이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현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진을 본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누… 누구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진은 아무 말 없이 후드를 벗었다. 그의 얼굴은 반쯤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깊은 눈빛과 흉터는 현에게 잊을 수 없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기억 안 나? 네가 죽인 줄 알았던 친구.”
진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현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상자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낡은 사진 몇 장, 빛바랜 일기장. 그리고… 녹슨 금속 필터 하나. 우리가 벙커에서 찾았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진… 진아? 설마… 네가 어떻게…”
현의 목소리는 찢어질 듯 했다. 공포와 경악,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뒤섞였다.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네가 버리고 간 그 지옥 속에서, 나는 너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버텼어. 매일 밤낮으로 이를 갈았어. 네가 마셨던 그 해독제 하나 때문에, 나는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어. 너는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었어!”
진은 한 발자국씩 현에게 다가섰다.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현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아니야! 진아, 오해하지 마!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어! 나도 죽을 뻔했어! 살기 위해서는…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고!”
현은 두 손을 들고 애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내가 없었다면 넌 그 필터를 찾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없었다면 넌 벙커 입구도 못 찾고 죽었을 거야. 그런데도 넌 나를 버렸어. 네가 살겠다고 내 목숨을 짓밟았어.”
진은 바닥에 떨어진 필터를 발로 툭 쳤다. 녹슨 필터가 현의 발치에 굴러갔다.
“이거… 네 목숨 줄이었지? 이것 때문에 날 버렸고, 이것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라왔겠지. 넌 내가 이 필터를 찾아냈고, 너에게 살려줄 기회를 주었을 때, 나에게 어떤 선택지를 주었지? 죽음.”
진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현은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발… 진아…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옛정? 네가 그딴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어? 내가 널 형처럼 따랐던 그때를 기억해? 나는 네 말을 믿었어. 세상에 믿을 사람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넌 짐승만도 못한 새끼였어!”
진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차가운 칼날이 지하실의 희미한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현은 질겁하며 뒤로 기었다.
“아니야! 진아! 난… 난 달라졌어! 이제는 사람들을 돕고 있어! 봐! 나는 이 요새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구했다고? 네가 남을 짓밟고 일어선 그 더러운 발로?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나를 버린 대가로 얻은 거야. 넌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 그리고 이제… 나는 너에게서 모든 것을 되찾을 거야.”
진은 칼을 든 채 현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현은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칼날을 바라봤다. 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복수의 눈물이었다.
“널 죽일 거야, 현아.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칼날이 번뜩였다. 현의 비명 소리는 좁은 지하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비명은 이내 흐느낌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흐릿한 신음으로 변했다.
***
밤은 여전히 차가웠다. 진은 폐교회 요새를 빠져나왔다. 그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불꽃이 이글거리지 않았다. 그저 메마른 사막만이 남아 있었다. 복수는 끝났다. 모든 것을 앗아갔던 그에게 모든 것을 되갚아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복수가 끝나자, 그를 지탱하던 유일한 기둥이 사라졌다.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은 여전히 냉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진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등 뒤에 남겨진 것은 폐허가 된 요새와, 그 안에 갇힌 어둠뿐이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홀로, 이 혹독한 세상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