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섞인 건조한 바람이 텅 빈 거리를 휘감았다. 한때 번성했을 도시의 흔적은 이제 그저 뼈대만 남은 거대한 무덤에 불과했다. 부서진 고층 빌딩들은 흉터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갈라진 아스팔트 위로는 이름 모를 가시 식물들이 질긴 생명력으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침묵은 압도적이었다. 살아있는 것은 오직 바람과, 그리고… 그 침묵 속을 걷는 한 사내뿐이었다.
진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망가진 지하 상가 입구를 응시했다. 몇 년을 이렇게 살아왔던가. 기억조차 아득했다. 대변동 이후, 세상은 숨 쉬는 것조차 사치가 되었다. 탁한 영기가 대기를 지배했고, 순수한 영기(靈氣)는 찾기 힘든 보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탁한 영기에 의해 변이된 짐승들은, 살아남은 인류에게 끝없는 위협이었다.
목마름과 허기,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며칠째 식수다운 식수를 입에 대지 못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이곳 폐허 깊숙한 곳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정화된 영수(靈水)’의 흔적이었다. 탁한 영기로 오염된 물을 마시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하지만 영수는 귀했다. 옛 수련자들이 사용했던 정화 시설이 파괴된 이후, 순수한 물은 전설이 되었다.
“젠장… 이런 곳에 남아있을 리가…”
진혁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낡았지만 영기로 강화된 경량 방어구를 고쳐 입고, 허리에 찬 진강검(眞鋼劍)을 단단히 잡았다. 검은 탁한 영기에 부식되지 않도록 그가 직접 영기를 불어넣어 단련시킨 것이었다.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지하 상가는 지상보다 더 음침하고 스산했다. 무너져 내린 천장 파편들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고, 상점의 잔해들은 마치 유령처럼 서 있었다. 진혁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의 온 감각이 곤두섰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축기술(築氣術)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감을 예민하게 단련시켰다. 특히 영기의 흐름을 감지하는 능력은 다른 생존자들보다 월등했다. 그는 미세한 영기의 파동을 따라 움직였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 때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깨끗한 영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진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었다. 드디어! 찾아낸 것인가?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탁기가 짙은 지하 상가의 한구석, 무너진 통로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영기는 주변의 탁기와는 확연히 다른, 맑고 청량한 기운이었다.
숨을 죽이고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그는 얼어붙었다.
작은 동굴 같은 공간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바닥의 작은 웅덩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웅덩이 속의 물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화된 영수였다!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이었다. 수년 만에 보는 영롱한 광경에 진혁은 순간 모든 고통을 잊었다.
그의 눈은 희망으로 빛났다. 저 영수만 마신다면… 적어도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웅덩이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등골에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크르르르…”
낮게 깔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진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섰다. 소리가 들린 곳은 웅덩이 바로 옆,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거대한 그림자였다.
어둠이 일렁이더니, 두 개의 붉은 눈이 진혁을 노려봤다.
‘변이된 비늘 늑대.’
그것은 일반적인 늑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온몸은 거무튀튀한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뼈대가 비정상적으로 솟아오른 척추와 날카로운 발톱은 흡사 칼날 같았다. 아가리에서는 썩은 고기 냄새와 함께 탁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탁한 영수에 의해 변이된 짐승이었다. 놈은 웅덩이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진혁은 진강검을 뽑아 들었다. 놈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진혁이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놈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안면을 향해 찢고 들어왔다.
콰아앙!
진혁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발톱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얼굴이 반으로 갈렸을 것이다.
그는 검을 휘둘러 놈의 옆구리를 노렸다. 진강검에 실린 그의 미미한 영기가 빛을 발했다. 그러나 놈의 비늘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쨍그랑! 칼날이 비늘에 부딪히며 섬광을 일으켰지만, 깊은 상처를 내지 못했다.
비늘 늑대는 고통받는 기색 없이 다시 진혁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앞발을 들어 올려 내리찍었다. 진혁은 검을 들어 막았다.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손목이 저릿해졌다. 놈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버틸 수 없다.
진혁은 이를 악물었다. ‘축기술’의 모든 영기를 검에 집중했다. 영기 강화! 검날이 푸른빛을 띠며 더욱 날카로워졌다. 놈의 공격을 밀어내며 그는 온몸의 힘을 실어 옆구리에 깊숙이 검을 꽂아 넣었다.
크아아아악!
비늘 늑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비늘을 뚫고 들어간 칼날은 내장을 찢었다. 놈은 몸부림치며 진혁을 벽으로 몰아붙였다. 거친 몸짓에 진혁은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어깨를 놈의 발톱이 스쳤다.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아픔보다 더 큰 것은 생존의 본능이었다.
진혁은 이를 악물고 놈의 심장으로 검을 깊이 밀어 넣었다. 놈의 몸부림이 멈췄다. 거대한 몸뚱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탁한 영기가 흩어지며 놈의 비늘 늑대는 서서히 재가 되어갔다.
하아… 하아…
진혁은 피 묻은 검을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어깨의 상처는 욱신거렸다. 영기가 바닥났다. 그는 겨우 몸을 가누어 영수 웅덩이 쪽으로 기어갔다.
살았다… 살았어…
푸른 영롱한 물이 손에 닿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떠 마시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르르르… 쿠르르르…
하나가 아니었다. 웅덩이 주변, 어둠 속에 숨겨진 좁은 통로에서 수십 개의 붉은 눈이 동시에 진혁을 향해 빛을 발했다. 방금 쓰러뜨린 비늘 늑대와 똑같은, 아니, 더 크고 흉악해 보이는 놈들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늘 늑대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뿜어내는 탁한 영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놈들은 진혁의 존재를 눈치채고, 웅덩이를 포위하고 있었다. 좁은 동굴 공간은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비늘 늑대로 가득 찼다. 그들의 붉은 눈빛은 굶주림과 광기로 번들거렸다.
진혁은 얼어붙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영수는 바로 코앞에 있었지만, 동시에 절망의 심연이었다.
지친 몸, 바닥난 영기. 그리고 압도적인 수의 적.
진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피 묻은 진강검을 움켜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곳에서 끝인가? 폐허 속에서 겨우 한 줄기 희망을 찾았다 싶었더니, 결국 이런 식인가?
수십 마리의 비늘 늑대들이 일제히 으르렁거렸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진혁의 숨통을 조여왔다.
진혁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 대신, 차가운 결의가 떠올랐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반드시.”
그의 검 끝이 섬뜩하게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