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노을이 지평선을 물들이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도 해는 뜨고 지는 법을 잊지 않았다. 유나는 녹슨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낡은 건물 잔해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손에는 몽둥이가 아닌, 손질된 칼이 들려 있었다. 오늘 저녁 식량이 될지도 모를 무언가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젠장, 오늘은 영 시원찮네.”

텅 빈 통조림 캔만 굴러다니는 슈퍼마켓 잔해를 뒤지던 유나가 중얼거렸다. 식량이 점점 귀해지는 건 매일의 일상이었다. 그녀는 이 빌어먹을 세상이 멸망한 지 5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넉넉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크, 크흡! 살려… 살려주세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 유나는 순간 움찔했다. 이런 세상에서 누군가의 비명을 듣고 달려가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비명은 애처로웠고, 무엇보다… 이상하게도 처절함보다는 어딘가 어설픈 느낌이었다. 유나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낡은 상점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유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한 남자가 넝마가 된 옷을 입은 채, 쥐 세 마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쥐들이 그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쥐들을 피해 엉성하게 테이블 위로 올라가려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모양이었다. 쥐들은 굶주린 눈으로 남자의 발치에 굴러떨어진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마지막 남은 통조림 캔이었다.

“으아악! 내… 내 통조림! 이리 오지 마, 이 파렴치한 쥐새끼들아!”

남자가 허우적대며 소리쳤다. 유나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렇게 덩치 큰 쥐 세 마리도 처리 못 해서 저러고 있다고? 이 세상에 흔하디흔한, 사람 팔뚝만 한 변이 쥐들이었다.

“젠장, 미쳤지 내가.”

유나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상점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의 날렵한 칼이 섬광처럼 움직였다. 휙, 휙, 휙! 순식간에 쥐 세 마리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 어어?!”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유나를 바라봤다. 유나는 쥐들을 힐끗 보더니, 남자의 발치에 굴러떨어진 통조림 캔을 툭 발로 찼다.

“그게 뭔데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키냐. 개밥통도 아니고.”

남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통조림 캔을 주워 들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 이건 마지막 남은 복숭아 통조림이에요. 이 멸망한 세상에서, 저에게 한 줄기 희망을 주는…!”

“개소리 말고.”

유나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너, 이 근처 살아? 아니면 길 잃었어? 난 이 구역에서 구걸하는 놈팽이들 상대할 시간 없어.”

“아, 저… 저는 지훈이라고 합니다! 길을 잃었다기보단… 탐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보급품에 문제가 생겨서…”

“탐험? 보급품? 지금 네 꼴을 봐라. 이 지경이 돼서도 허세는 여전하네.”

유나는 혀를 찼다. 지훈이라는 남자는 멸망 전에도 이렇게 해맑고 철없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외모는 또 준수했다. 이 칙칙한 세상에서 저렇게 멀끔한 얼굴이라니, 좀 의아할 정도였다.

“제 꼴이 좀 그렇긴 하지만, 사실 저… 요리사였습니다!”

지훈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려다, 옷이 너무 헤져서 오히려 더 옹색해 보였다.

“요리사? 지금 이 상황에 그딴 게 무슨 소용이냐. 불 피울 땔감도 없고, 재료도 없고, 먹을 것 자체가 없는데.”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도… 맛있게 먹는다는 건 중요한 거라구요! 그리고 전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안전하고 맛있는 식물들을 구별할 줄 압니다!”

지훈은 허세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지껄였다. 유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은 글렀다. 쥐 세 마리 잡은 게 다였다.

“어차피 쥐도 잡았겠다. 여기서 잡을만한 게 있다면 오늘 저녁으로 먹을 거고, 없으면 넌 그냥 죽어.”

유나는 쥐들을 꿰어 차고 낡은 건물 잔해 안으로 들어섰다. 지훈은 당황한 듯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유나가 임시 거처로 삼고 있는 곳은 낡은 창고 건물이었다. 그나마 빗물이 덜 새고, 주변을 경계하기 좋은 위치였다. 유나는 쥐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는 쥐고기라도 귀한 단백질원이었다.

“저… 저기, 쥐를 통째로 굽는 건가요?”

지훈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그럼 어쩌겠냐. 양념이 어디 있고, 칼질해서 꼬치 만들 도구가 어디 있어. 그냥 먹어.”

유나는 불씨를 살려 작은 불을 피우고 쥐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고기가 익어가며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크흠, 음… 제 생각엔, 이렇게 굽는 것보다는 좀 더 향신료를 넣어서 볶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향신료? 그걸 어디서 찾을 건데? 허공에서 솟아나냐? 이거나 고맙게 먹어.”

유나는 막 구워진 쥐고기를 툭 던지듯 지훈에게 건넸다. 지훈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기를 받아들었지만, 굶주림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우물쭈물 한입 베어 물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먹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네요?”

“맛있냐? 맛있으면 다행이고.”

유나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좀 안심했다. 제법 깐깐해 보이는 녀석이라 안 먹겠다고 버틸까 봐 걱정했으니까. 그때 지훈이 뭔가 생각난 듯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졌다.

“아! 맞다! 제가 낮에 찾아낸 건데, 이거 혹시… 식용 가능한가요?”

지훈이 내민 것은 붉은색 열매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나뭇가지였다. 유나는 그걸 받아들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거… 설마 산딸기야?”

“네! 제가 아침부터 찾아 헤맨 귀한 열매입니다! 이 주변에 딱 한 그루 있더라구요! 생으로 먹어도 되고, 끓여 먹어도 좋은데…”

지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나는 산딸기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멸망 이후 처음 느껴보는 맛이었다. 이런 달콤함을 맛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걸 어디서 찾았다는 거야?”

유나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지훈은 으쓱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음, 제가 이런 건 기가 막히게 잘 찾거든요. 이름하여… 지훈표 힐링 푸드 탐색 능력!”

“힐링 푸드 탐색 능력은 또 뭐야. 별 희한한 능력 다 있네.”

유나는 피식 웃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지훈도 그녀의 미소를 보더니 덩달아 헤실헤실 웃었다.

“이 산딸기들을 쥐고기랑 같이 먹으면 훨씬 맛있는 특제 요리가 될 겁니다! 제가 오늘 밤에 레시피를 구상해볼까요?”

“레시피 같은 소리 하네. 그냥 먹어. 내일 아침에 남으면 모를까.”

유나는 쥐고기와 산딸기를 번갈아 먹었다. 쥐고기의 비린 맛이 산딸기의 상큼함으로 중화되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날 밤, 유나는 지훈과 함께 창고에서 잠들었다. 서로 등지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유나는 눈을 떴을 때 코끝을 스치는 묘한 향기에 잠시 멍해졌다. 그건 분명 쥐고기 냄새였지만, 어딘가 다른… 상큼하면서도 고소한 향이었다.

“일어났어요? 아침 식사 준비했습니다!”

지훈이 낡은 양은 냄비 앞에서 뿌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냄비 안에는 산딸기 즙으로 양념한 듯한 쥐고기 볶음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주변에는 어제 그 산딸기 잎사귀들이 깔끔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너… 이걸 직접 다 한 거야?”

유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럼요! 제가 어젯밤에 얼마나 고심해서 레시피를 짰는데요. 이름하여… ‘황무지 스윗&샤워 쥐고기 볶음’! 비록 쌀은 없지만, 이 세상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요리입니다!”

지훈은 자랑스럽게 요리를 내밀었다. 유나는 반신반의하며 젓가락(사실은 나뭇가지였다)으로 한 조각 집어먹었다.

“음?!”

입안에 퍼지는 맛은 놀라웠다. 쥐고기의 잡내는 사라지고, 산딸기의 새콤달콤함과 알 수 없는 향신료(아마도 지훈이 찾은 풀떼기들이겠지)의 향이 어우러져 제법 근사한 맛을 냈다.

“이거… 먹을 만하네.”

유나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젓가락질은 멈추지 않았다. 지훈은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봐요, 셰프님. 제가 그랬죠? 이런 세상에서도 맛있는 음식은 중요한 거라고.”

“셰프는 또 뭐야. 그냥 유나라고 불러.”

“앗, 네! 유나 셰프님!”

“셰프도 빼라고.”

유나가 핀잔을 주자 지훈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흥, 알겠습니다. 유나 씨.”

그렇게 둘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유나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지훈은 시종일관 해맑았다. 그녀가 식량을 찾아 위험한 곳을 헤맬 때면, 지훈은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이 풀은 독이 없구요, 저 나무 열매는 떫어요!” 라며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물론 가끔은 유용한 정보도 주곤 했다.

어느 날, 유나가 낡은 마트에서 통조림을 뒤지다가 변이된 들개 떼와 마주쳤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들개들을 보고 유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때, 지훈이 갑자기 나서며 외쳤다.

“들개들아! 잠시 기다려봐! 이 음식, 너희에게도 나눠줄게!”

“야! 너 미쳤냐?! 들개한테 음식을 줘?!”

유나가 소리쳤지만, 지훈은 이미 들개들에게 쥐고기 볶음 한 조각을 던져주고 있었다. 들개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쥐고기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더 이상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으르렁거림도 잦아들었다.

“보세요, 유나 씨! 모든 생명체는 맛있는 음식에 약하다구요!”

지훈이 뿌듯하게 말했다. 유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개떼가 음식을 먹고 순해진다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유나는 지훈의 의외의 능력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투에는 젬병이었지만, 주변 환경을 놀랍도록 잘 파악했고, 위험한 식물과 유용한 식물을 구별하는 데 탁월했다. 게다가 그의 요리는 이 황폐한 세상에서 유일한 낙이었다.

***

시간이 흘러 여름이 찾아왔다. 물은 더 귀해졌고, 뜨거운 태양은 모든 것을 바싹 말렸다. 둘은 새로운 거처를 찾아 이동 중이었다.

“흐읍, 흐읍… 유나 씨, 정말 이대로 가면… 새로운 생존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지훈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징징거리지 마. 내가 찾으면 찾는 거야.”

유나는 대꾸했지만, 사실 그녀도 지쳐 있었다. 식량도, 물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빛이 바랜 건물 잔해들 사이로 푸른 덩굴들이 기어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 저기 봐!”

지훈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덩굴 사이로 얼핏 보이는 것은… 포도나무였다. 아니, 변이된 포도나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 푸른 잎사귀와 탐스러운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둘은 미친 듯이 달려갔다. 포도나무는 낡은 아파트 건물 한쪽 벽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지훈이 망설임 없이 포도 한 알을 따서 맛을 봤다.

“와… 달콤해! 이건 정말… 천국의 맛이에요, 유나 씨!”

지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유나도 한 알 따서 입에 넣었다. 잊고 지냈던 달콤함이 온몸에 퍼졌다. 멸망 이후 처음으로, 둘은 배부르게 포도를 따 먹었다. 물까지 풍부하게 보충되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둘은 포도나무 아래에서 캠프를 차렸다. 지훈은 능숙하게 불을 피우고, 포도를 이용한 쥐고기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짜잔! ‘황무지 포도 곁들인 쥐고기 스테이크’입니다! 오늘 밤은 이 척박한 세상에서 즐기는 미식의 향연입니다!”

유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는 지훈의 허세가 익숙해졌다. 그녀는 쥐고기 스테이크 한 조각을 포도와 함께 먹었다. 역시나 환상의 맛이었다.

“근데 유나 씨.”

지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

“만약 이 세상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다면… 저랑 같이 레스토랑 열어주실 건가요? 제가 셰프하고, 유나 씨는… 음… 맛 평가 담당? 아니면 재료 수급 담당?”

유나는 그 말을 듣고 쥐고기를 삼키다 컥 하고 사레들렸다.

“콜록! 콜록! 네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세상이 어떻게 예전처럼 돌아와? 그리고 내가 왜 너랑 레스토랑을 열어? 그리고 내가 왜 맛 평가를 해?!”

“왜긴요, 유나 씨가 제 음식 제일 맛있게 먹어주잖아요! 물론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사실은 제 요리를 가장 사랑하는 게 유나 씨라는 걸 전 알고 있습니다!”

지훈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유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 무슨 개소리야! 누가 네 요리를 사랑해! 그냥 굶어 죽기 싫어서 먹는 거지!”

“헤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세상이 돌아오면, 제가 유나 씨한테 맨날 맛있는 거 해주면서 따라다닐게요!”

지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유나는 대꾸하지 않고 남은 쥐고기 스테이크를 우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 멸망한 세상에서, 이렇게 바보 같은 남자와 함께라면… 어쩌면 살아남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기대되는 미래였다. 푸른 포도송이가 가득한 밤하늘 아래, 둘의 투닥거리는 로맨스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