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밤 10시 30분. 지혜는 노트북 화면 속 로맨스 드라마에 완벽하게 몰입해 있었다. 바닥에 놓인 머그잔에서 갓 내린 캐모마일 차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실내를 채운 따뜻한 공기는 포근한 안정감을 주었다. 딱 완벽한 밤이었다.

그때였다.
“딸깍!”
거실 한쪽 냉장고 문이 스스로 열렸다 닫혔다. 지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바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기를 위해 살짝 열어두었던 작은 창문조차도 꼼꼼하게 잠겨 있는 것을 확인했다. 착각인가 싶어 다시 드라마에 집중하려는데, 이번엔 주방 선반 위 유리컵들이 미묘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뭐야, 왜 이래?”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컵들은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지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공포가 목구멍을 턱 막았다. 숨쉬기조차 힘든 찰나, 거실 테이블 위 리모컨이 ‘스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리모컨을 주워 올리려던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확 끼쳐왔다. 마치 누군가 바로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

지혜는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때였다. 주방 싱크대 위에서 과일 접시가 덜컥 흔들리더니, 접시 위 사과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작은 포크가 접시에서 튕겨 나가 벽에 부딪쳐 ‘쨍’ 소리를 내며 박혔다. 평범한 식기가 벽에 박히는 광경은 비현실적이다 못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흐읍… 흐읍…”
지혜는 숨을 헐떡이며 소파 한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드라마도, 차 한 잔의 여유도, 평범했던 밤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했다.

***

같은 시간, 몇 층 위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던 세라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짝이는 불빛들 아래로 수많은 욕망과 슬픔이 뒤섞여 흐르는 것을 느끼는 것은 이제 일상이었다. 그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미하지만 섬뜩한 기운이 치솟는 것을 포착했다. 504호 방향이었다.

‘또 시작이군.’
세라의 하늘색 눈동자에 지루함과 짜증이 스쳤다. 지난달에는 7층에서, 그 전 달에는 12층에서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불운’이나 ‘착각’으로 치부하겠지만, 세라에게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파동’이었다. 그리고 그 파동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세라는 난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착지했다. 어둠 속에 녹아들듯 쥐 죽은 듯 조용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향했다. 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504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피부를 훑었다. 기분 나쁜 한기와 함께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과 울음소리.

‘이번엔 좀 심각한데.’
세라는 504호 문 앞에 섰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문고리에 가볍게 얹자, 푸른 빛이 손끝에서 흘러나와 문고리를 감쌌다. 텅 비어 있던 공간에 작은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세라의 몸이 그 틈새로 사라졌다.

방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거실장은 뒤집혀 있었고, 책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으며, 벽에 걸려 있던 액자들은 떨어져 깨져 있었다.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지혜는 공포에 질려 소파 한구석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깨물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서 검고 흐릿한 형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거대한 증오와 슬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기운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멋대로 움직이며 파괴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집안에 생긴 것 같았다.

세라가 발을 내딛자, 흐릿한 형체는 그녀를 향해 촉수처럼 뻗어 나왔다. 마치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불청객을 경고하듯이.
“흥, 고작 이 정도.”
세라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 정도의 원념이라면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원념 속에 깃든 강력한 증오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넘어, 현실의 벽에까지 작은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저 균열이 더욱 벌어지면 평범한 인간들에게도 위험해질 터였다.

세라는 허리춤에 찬 작은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펜던트는 순수한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푸른 빛을 내는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계약 실행, 여명(黎明)의 별!”
순간, 펜던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세라의 몸을 감쌌다. 짙은 밤색의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는 순식간에 순백의 제복으로 바뀌었고, 머리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티아라가 얹혔다. 손에는 영롱한 푸른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가 들렸다. 그녀의 몸을 감싸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음습한 기운마저도 잠시 위축되는 듯했다.

변신을 마친 세라는 지팡이를 휘둘러 형체를 향해 빛의 파동을 쏘아냈다.
“끼아아악!”
형체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지만, 곧 더욱 거세게 세라를 향해 돌진했다. 방 안의 물건들이 공중에 떠올라 세라에게 날아들었다. 깨진 액자 조각, 뒤집힌 의자, 심지어 냉장고 문이 통째로 뜯겨 나와 거대한 방패처럼 세라를 덮치려 했다. 세라는 능숙하게 지팡이로 그것들을 쳐내거나 마법 방어막으로 막아냈다.

‘이건 단순한 원한이 아니었어. 오랜 시간 한곳에 고여 응축된 절망이군.’
세라의 눈은 흐릿한 형체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핵을 발견했다. 검은 기운의 중심에서 마치 심장처럼 불안하게 뛰고 있는 그것이 바로 모든 현상의 근원이었다.
“거기 있었군.”
세라는 지팡이 끝을 핵을 향해 겨눴다. 그녀의 온몸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지팡이 끝에 모여들어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형성했다.
“정화의 빛!”
강렬한 빛의 덩어리가 형체를 꿰뚫자, 검은 기운은 비명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한기와 음습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중에 떠 있던 물건들이 털썩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고, 기괴한 현상도 멎었다.

지혜는 멍하니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일들에 그녀의 정신은 완전히 혼미해져 있었다. 세라는 변신을 풀고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푸른빛 펜던트만이 여전히 그녀의 허리춤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세라의 목소리에 지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누… 누구세요?”
지혜는 눈을 비볐다. 눈앞의 여자가 정말 방금 전 그 엄청난 일을 벌인 사람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세라는 창백해진 지혜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흩어진 검은 기운이 사라진 벽의 한 지점에 멈춰 있었다. 그곳에는 희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균열이 생겨 있었다. 검은 기운이 응축되어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네요.”
세라의 목소리에 섞인 옅은 불안감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혜는 공포에 질린 채 세라의 시선을 따라 그 미세한 균열을 바라보았다. 균열 너머에서,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가 속삭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밀려왔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괴상한 밤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