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심연의 칼날**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잿빛 그림자가 짙게 깔린 복도를 따라, 카론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은 유령처럼 가벼웠지만, 그 그림자 아래에는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가 숨 쉬고 있었다. 이 성, 한때 우정의 맹세가 속삭여지고 꿈이 피어나던 이 장소는 이제 배신의 피로 얼룩진 망각의 무덤이 되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돌벽에서 풍겨오는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마법의 잔향이 코끝을 스쳤다. 카론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벽에 걸린 낡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은빛 바탕에 검은 뱀이 휘감겨 솟아오르는 문양. 세르펜, 그 배신자의 가문 문장이었다. 문양을 보는 순간, 잊고 싶었던 과거의 조각들이 칼날처럼 심장을 꿰뚫었다.

*친구여, 우리는 이 문장 아래에서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그날, 함께 검을 맞대고 맹세했던 세르펜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듯했다. 찬란했던 젊음, 무한한 가능성, 그리고 두 사내의 뜨거운 우정.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순간의 탐욕과 권력욕 앞에 무참히 짓밟혔다. 세르펜은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고, 그 위에 그의 모든 것을 쌓아 올렸다. 그의 이름, 그의 명예, 그의 사랑까지도.

“크윽…!”

카론의 손이 저절로 검은 장갑 아래의 흉터 위로 향했다. 살점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던 고통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새겨진 배신의 상흔은 여전히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심연의 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다. 재가 된 희망을 연료 삼아, 망자가 된 심장으로. 오직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정신을 다잡자,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력 감지술. 카론은 즉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복도 저편에서 철컥거리는 갑옷 소리와 함께 두 명의 경비병이 나타났다. 그들은 손에 거대한 미늘창을 든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상 없나?”

“아직. 대마법사님께서 너무 과민하신 듯합니다.”

“조용히 해. 불명예스러운 자의 그림자라도 이 성에 얼씬거리는 걸 용납 못 하실 거야.”

카론은 경비병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불명예스러운 자’. 그들이 말하는 것이 자신임을 알았다. 멸시와 경멸이 담긴 그들의 말에도 카론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은 더욱 차갑게 빛났다. 경비병들이 고개를 돌려 반대편으로 향하는 순간, 카론의 몸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쉬이이익!

그의 손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비수처럼 날카로운 그림자 칼날이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앞서가던 경비병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경비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의 동료는 겨우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앙!

카론의 주먹에서 어둠의 에너지가 폭발했다. 강력한 충격파가 경비병의 갑옷을 찌그러뜨리고 그를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경비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엎어졌다. 카론은 쓰러진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경비병을 덮쳤다.

“세르펜은 어디에 있지?”

카론의 목소리는 지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듯 낮고 사늘했다. 경비병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카론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흐… 흐흐흐… 죽어라, 저주받은 그림자! 대마법사님의 위대한 계획을 방해할 순 없어!”

경비병은 갑자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더니,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핏줄기가 솟구쳤다. 카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결이라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위대한 계획…?”

죽어가는 경비병의 입에서 핏빛 거품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은 여전히 카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분은… 영원한… 세계를… 영원한…!”

그는 마지막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카론은 그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세르펜, 그자는 이제 단순히 권력을 탐하는 것을 넘어선 듯했다. ‘영원한 세계’라니. 헛소리 같으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배신자 주제에 감히 어떤 짓을 꾸미고 있는가?

카론은 피 묻은 바닥을 가볍게 밟고 지나쳤다. 경비병의 죽음은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수년 간의 고통과 복수심은 그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다만, 세르펜의 ‘계획’이라는 말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세르펜의 목을 따는 것을 넘어, 그자가 꾸미는 모든 것을 파헤쳐 부숴버려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복도의 끝, 거대한 이중 철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문에는 복잡한 마법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에서는 강력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문 뒤에, 세르펜이 있을 터였다. 혹은, 그의 모든 계획의 심장이.

카론은 철문 앞에 섰다. 차가운 금속에 손을 얹자, 문에 새겨진 마법 문양이 그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어둠의 힘이 그의 손끝에서부터 철문으로 흘러들어갔다. 마법 문양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복수. 그 단어가 그의 피 속에서 끓어올랐다. 심연에서 돌아온 칼날은 이제 그 피에 흠뻑 젖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철문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마력과 함께, 알 수 없는 존재의 서늘한 기운이 카론의 전신을 감쌌다. 과연 그 문 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복수의 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심연의 시작일까.

카론은 망설임 없이,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