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어둠을 베고 내려앉았으나, 산자락 아래 마을에는 잠든 자가 없었다. 눅진한 흙먼지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공기 중에 떠돌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제국 병사들의 고함 소리는 굶주린 배에서 울리는 원성처럼 마을 사람들의 귓가를 맴돌았다. 오늘 아침, ‘황제폐하의 은혜’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모든 곡식 창고가 털렸다. 남은 것이라곤 바닥에 흩뿌려진 쌀알 몇 톨과, 매질에 쓰러진 노인의 신음 소리뿐이었다.
강하율은 낡은 창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녹슬어 거뭇한 낫 한 자루. 본래는 논밭을 매던 도구였으나, 이제는 제국 병사의 목을 노리는 무기로 변해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짙은 밤하늘처럼 깊었고, 그 안에선 불길이 일렁였다.
“이대로는 안 돼.”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옆에 앉은 진영감의 앙상한 어깨가 들썩였다. 진영감은 이 산자락에서 나고 자란 이들 중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듣는 노인이었다. 앙상한 손으로 마른 기침을 토해낸 진영감이 말했다.
“젊은 우두머리여, 그 불길은 결국 우리 자신을 태울 것이오. 제국의 군대는 하늘을 덮고, 그들의 무기는 강철로 만들어졌소. 우리는 맨몸에 농기구뿐인데….”
“그럼 그대로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곡식을 빼앗기고, 자식들을 노예로 끌려 보내고, 아녀자들을 능욕당하면서도 그저 숨만 쉬며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하율의 목소리가 커지자, 창고에 모여든 서른 남짓한 젊은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모두 하율과 같은 처지였다.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짓밟히고, 오직 복수와 생존의 일념으로 모여든 이들이었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르신. 어찌 감히 제국의 군대와 맞서겠냐고 하셨습니까? 그 군대가 오늘 우리 손으로 키운 곡식을 빼앗아 갔고, 병든 아이의 마지막 빵 조각마저 짓밟았습니다. 우리가 잃을 것이 무엇이 더 남았단 말입니까?”
하율의 말이 이어지자 젊은이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오직 분노와 절규만이 가득했다.
진영감은 잠시 말을 잃었다. 하율의 말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이미 백성들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뜯어갔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알았소.” 진영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허나, 무모한 싸움은 피해야 하오. 우리는 아직 약하고, 저들은… 너무나 강하오.”
“약하더라도 뭉치면 작은 돌멩이도 산을 부술 수 있습니다.” 하율은 낫을 꽉 쥐었다. “어르신, 제국의 보급 마차가 내일 새벽, 서쪽 고갯길을 지날 것입니다. 오늘 빼앗긴 곡식 대부분이 실려 있을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하율에게 쏠렸다. 그들 중 몇몇은 비장한 각오를 다졌고, 또 몇몇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우리는 그 마차를 빼앗을 겁니다.” 하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저 곡식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님을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겁니다.”
***
다음 날 새벽, 짙은 안개가 서쪽 고갯길을 휘감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세상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고요를 깨고 마차 바퀴의 삐걱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국군의 보급 마차 행렬이었다.
선두에는 제국 보병 열 명이 창을 들고 경계를 섰고, 그 뒤를 다섯 대의 마차가 따랐다. 마차마다 서너 명의 병사들이 올라타 삼엄하게 주위를 살폈다. 맨 뒤에는 말을 탄 제국군 장교가 위압적인 자세로 행렬을 지휘하고 있었다. ‘백호대’의 상징인 하얀 호랑이 문양이 새겨진 갑옷이 안개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멈춰!”
갑자기 숲 속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순간 제국군 병사들이 당황하여 멈춰 섰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낡은 가죽 옷을 입고, 낫, 곡괭이, 몽둥이 같은 투박한 무기를 든 그림자 같은 무리였다. 강하율이 선두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일렬로 도열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과 굶주림이 역력했으나, 눈빛만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겨우 이딴 잡것들이 길을 막아? 죽고 싶어 환장했군!”
맨 뒤의 장교가 비웃듯이 말하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백호대 소속의 ‘천무’라는 자로, 무수한 백성들을 짓밟고 피를 흘리게 한 잔혹한 인물이었다.
“잡것들은 너희 제국 병사들이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놈들!”
한 젊은이가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그를 시작으로, 숨죽여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숫자는 제국군보다 훨씬 많았다.
천무는 코웃음을 쳤다. “하찮은 것들! 모두 쓸어버려라!”
제국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추고 창을 내밀었다. 창끝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율은 낫을 휘두르며 가장 먼저 선두의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냥과 농사로 단련된 몸이었다. 비록 정식 무공은 아니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빠르고 맹렬했다.
“크악!”
하율의 낫이 병사의 창을 쳐내며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그 틈을 타 다른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병사들을 둘러쌌다.
하지만 백호대의 병사들은 역시 달랐다. 훈련된 움직임으로 우왕좌왕하는 마을 사람들을 베고 찔렀다. 몽둥이가 부러지고, 낫이 휘어졌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붉은 피가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율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의 낫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아이들, 매질에 죽어간 노인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그때, 진영감이 숲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무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다! 굴려라!”
나무꾼들이 밧줄을 끊자, 거대한 통나무 몇 개가 비탈길을 따라 맹렬하게 굴러 내려왔다. 굉음과 함께 굴러오는 통나무는 보급 마차 행렬을 덮쳤다.
“피해!”
천무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통나무는 두 대의 마차를 그대로 덮쳤고, 마차는 산산조각이 나며 실려 있던 곡식 포대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병사 몇 명이 통나무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곡식 포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흩어진 포대에서 쏟아지는 쌀알을 움켜쥐는 그들의 손길은 절박했다. 어떤 이는 찢어진 옷자락에, 어떤 이는 주머니에, 필사적으로 쌀을 담았다.
“젠장할! 전부 잡아라!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천무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달려드는 마을 사람들을 베었다. 그는 진정한 살수였다. 하율은 천무의 잔혹한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그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곡식을 챙길 시간을 벌어야 했다.
“가져가! 어서 가져가!” 하율은 소리쳤다.
그의 눈은 이미 천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천무의 검과 하율의 낫이 부딪히는 쇠붙이 소리가 안개 낀 고갯길에 울려 퍼졌다. 하율의 낫은 천무의 정교한 검술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의 움직임에는 필사적인 생존 본능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투박한 낫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발톱처럼 천무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마을 사람들은 흩어진 곡식들을 움켜쥐고 서둘러 숲 속으로 도망쳤다. 한 대의 마차는 이미 부서졌고, 나머지 마차들 중 하나에서 쌀 포대를 챙기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곡식은 단순히 식량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이자, 저항의 증표였다.
“멈춰라! 감히 제국의 것을 훔치고 달아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천무가 포효하며 하율을 향해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하율의 어깨에 스치는 검날에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진영감이 외쳤다.
“하율아! 됐다! 물러서라!”
하율은 진영감의 목소리에 잠시 주춤했다. 이미 많은 마을 사람들이 숲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는 천무를 향해 낫을 냅다 던진 뒤, 재빨리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낫은 천무의 어깨 갑옷에 박히며 그를 잠시 멈칫하게 했다.
“죽여라! 모두 쫓아가서 죽여!”
천무의 고함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숲 속을 질주하는 하율의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묘한 희망이 엿보였다.
쌀을 움켜쥔 채 숲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하율은 중얼거렸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시작은 이제부터다.”
고갯길의 안개가 걷히고 희미한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피와 흙먼지로 뒤덮인 고갯길 위로, 제국군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들의 추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 아래, 작고 미약한 들불이 타오르기 시작했음을, 제국은 아직 알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