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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심연의 입맞춤, 흔들리는 경계**
축축한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이따금 바닥의 고인 물을 때렸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엘라라의 단검이 묵직한 마물의 머리에서 뽑혀 나왔다. 끈적한 녹색 피가 공중으로 흩뿌려지고, 방금 전까지 사지를 휘두르며 위협하던 심연 거미는 끝내 허물어졌다.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엘라라의 은색 눈동자가 사방을 빠르게 훑었다. 또 다른 위협은 없는지,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그림자는 없는지.
“괜찮아?”
낮고 굵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카엘이었다. 그의 그림자 같은 형체가 엘라라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며, 주변의 남은 위협을 확인하는 듯했다. 엘라라는 거미의 독액에 살짝 닿아 따끔거리는 손목을 붙들었다. 작은 상처였지만, 깊은 던전에서는 작은 실수조차 치명적일 수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엘라라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카엘은 말없이 다가와 엘라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피부는 어둠처럼 차가웠지만, 닿는 곳은 오히려 뜨거운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얇은 가죽 장갑 위로도 느껴지는 그의 손가락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인간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종족 특유의 섬세한 힘이 느껴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엘라라의 손목 위를 쓸었다. 옅게 솟아오른 붉은 반점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종족에게 전해지는 치유 능력이었다. 금지된 종족의 금지된 접촉. 엘라라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올랐다.
“무리하지 마. 이곳은…… 다르다.” 카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안에, 엘라라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럼에도 강인한 한 여인의 모습.
엘라라는 카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눈빛에 얼마나 많은 비밀과 고통, 그리고 감춰진 열망이 담겨 있을까. 그들의 사랑은 이 심연의 미궁만큼이나 깊고 위험했다. 인간 세계에서는 이단으로, 카엘의 종족에게는 불경한 행위로 여겨질 관계. 서로에게 허락되지 않은 존재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너무 깊숙이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너와 함께라면, 어떤 곳이라도 괜찮아.” 엘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진심이었다.
카엘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언뜻 욕망과 고뇌가 스쳤다. 그는 엘라라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쿠구궁! 쿠구궁!
땅이 흔들리고, 천장의 작은 돌멩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카엘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는 엘라라의 손목을 놔주고 몸을 돌렸다.
“저쪽이다.”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은 방금 전 쓰러뜨린 심연 거미가 나온 통로였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마물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기운이 동굴 전체를 짓눌렀다.
“저건… 심연의 심장부에서만 나타난다는 포식자 아닌가?” 엘라라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전설로만 듣던, 미궁의 정점에 선 존재 중 하나.
거대한 몸집이 서서히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뿔이 솟아난 머리, 여섯 개의 거대한 다리, 그리고 온몸을 휘감은 검붉은 비늘. 눈은 마치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마그나 포식자’.
마그나 포식자는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을 발견하고 으르렁거렸다. 귀청을 찢는 포효와 함께 돌진해오자, 엘라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젠장, 이런 곳에서 이걸 만나다니!”
카엘은 이미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포식자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어둠의 기운이 깃든 그의 단검이 맹렬하게 비늘을 노렸다. 그러나 포식자의 비늘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쇠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을 뿐, 비늘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피해, 카엘!”
엘라라는 외치며 손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섬광처럼 빛나는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고, 푸른 번개가 포식자의 다리를 향해 쇄도했다. 콰앙! 번개가 비늘을 강타하자, 포식자가 잠시 움찔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엘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등을 노려!” 엘라라가 소리쳤다. “비늘이 약한 곳이 있을 거야!”
그녀는 연달아 마법 화살을 쏘아 올렸다. 마법 화살은 포식자의 시선을 끌었고, 그 사이 카엘은 번개 같은 속도로 포식자의 등 뒤로 올라탔다. 거대한 몸집 위에서, 그의 검은 그림자가 춤을 추듯 움직였다. 포식자는 격분하여 몸을 흔들었고, 카엘은 간신히 비늘 틈새에 발을 박고 버텼다.
서걱!
카엘의 단검이 마침내 비늘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검붉은 피가 솟구쳤지만, 포식자는 엄청난 괴력을 휘둘러 카엘을 내동댕이치려 했다.
엘라라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 약점이 더 없을까. 포식자의 눈빛이 번득이며 그녀를 향했다. 거대한 발이 땅을 울리며 엘라라에게로 돌진했다.
“엘라라!” 카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그는 아직 포식자의 등에 있었다.
피할 틈도 없이 거대한 발이 그녀를 덮치려는 순간, 엘라라는 전신에 마력을 폭발시켰다. 온몸이 강렬한 빛에 휩싸이며,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돌진하던 포식자는 그녀가 있던 자리의 바닥을 산산조각 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엘라라의 눈에 포식자의 거대한 목덜미가 들어왔다. 그곳에 흐르는 혈관이 다른 곳보다 미세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약점일지도 몰랐다.
“카엘! 목! 목을 노려!” 엘라라가 모든 힘을 짜내 외쳤다.
카엘은 엘라라의 말을 듣자마자, 포식자의 등줄기를 타고 목덜미로 질주했다. 포식자는 자신을 떼어내려 몸부림쳤지만, 카엘의 움직임은 그 어떤 던전 마물보다도 민첩했다.
어둠의 기운이 카엘의 단검에 집중되었다. 검날이 마치 심연 그 자체처럼 검게 빛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포식자의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꿰에엑!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포식자의 몸이 경련했다.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땅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정적이 찾아왔다. 끈적한 피비린내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엘라라는 벅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포식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카엘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물들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쉬이익.
작은 마찰음이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숨겨진 스위치가 작동하는 듯, 혹은 누군가 무언가를 여는 듯한 소리였다.
동굴 한쪽 벽면에서, 돌덩이가 천천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얇고 푸른 빛이 깜빡였다. 누군가가 던전 깊숙이 숨겨 놓은 감시 장치였다. 작고 정교한 수정 구슬 형태의 장치가 천천히 회전하며 그들을 향했다.
카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의 눈동자에 깊은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그들’의 표식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젠장, 우리가 여기까지 쫓기고 있었다니.”
그 순간, 감시 장치의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마치 투사된 홀로그램처럼, 익숙한 문양이 떠올랐다.
붉은 두루미.
인간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탐사 길드, ‘적학단’의 문양이었다.
엘라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적학단은 냉정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길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종족을 맹렬히 증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쫓아 이 던전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카엘과 엘라라, 두 이종족 사이의 금지된 관계를 이미 알고, 이들을 덫으로 유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카엘은 엘라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이번에는 격렬하게 떨렸다.
“엘라라… 도망쳐야 해.”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노리는 게 아니야. 너를 통해 나를 잡으려는 거다.”
그의 눈빛은 비통함과 후회,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이제 그들을 둘러싼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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