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서아, 평범한 열아홉 살 여고생이자, 밤의 그림자 속에서 별의 힘을 빌려 싸우는 ‘수호자’다. 이따금씩 이어진다는 게 문제지만.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늦게까지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졸음과 사투를 벌이다가 겨우 한숨 돌릴 참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지긋지긋한 수학 공식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내일 아침까지 해낼 리 없는 숙제 더미가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피곤에 절어 침대에 드러눕는 순간, 손목에 차고 있던 은색 팔찌에서 섬뜩할 정도로 강한 진동이 울렸다.
“젠장, 또야?”
신음과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팔찌의 보석이 붉은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이건 비상사태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 정도 강렬한 진동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서아, 상황이 좋지 않아.”
귓가에 나직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 고양이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내 파트너, 묘령이었다.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공간을 가로지르는 검은 고양이의 형상으로,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지금은 반투명한 영체 상태로 내 방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이번엔 또 뭔데요, 묘령. 설마 또 길 잃은 유령이 전봇대랑 싸우는 건 아니겠죠?” 내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투덜거렸다. 지난번엔 정말 한밤중에 할머니 유령이 전봇대를 자기 남편으로 착각하고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주변 주민들을 다 깨웠던 적이 있었다. 그 사태 수습하느라 내 마력의 절반을 썼다고!
묘령의 꼬리가 낮게 흔들렸다. “장난이 아니야, 서아. 이건…. 혼란의 기운이 너무 강해. 단순한 원념이나 길 잃은 영혼이 아니야. 누군가의 깊은 절망이, 현실을 침범하고 있어.”
묘령의 목소리에 일말의 긴장이 스며 있었다. 그의 촉각은 언제나 정확했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사라졌다. 깊은 절망이 현실을 침범했다고? 그건 여태껏 상대해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위치.”
“은하수 아파트 1204호. 도시 외곽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다. 에너지가 끊임없이 증폭되고 있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주변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도시 외곽의 낡은 아파트 단지라니, 상상만으로도 음침했다. 나는 재빨리 교복 대신 활동하기 편한 후드티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마법소녀라고 해서 번쩍이는 변신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잠입과 조사가 더 중요했다. 일단은 평범한 이서아의 모습으로.
밤거리는 적막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도 앱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은하수 아파트를 찾아갔다. 허름한 외벽에 낡은 간판이 겨우 붙어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보안은 허술해 보였고, 복도에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만이 어둠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1204호 앞.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문틈으로 기이한 한기가 새어 나왔다. 마치 얼음장 같은, 동시에 무언가 불쾌한 냄새가 섞인 한기였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들. 뭔가 깨지는 소리, 물건이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린 흐느낌.
“확실해, 묘령. 엄청나게 강해.”
“안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아마 피해자일 거야.”
묘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저편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깨지는 소리도 함께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결심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있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담했다.
거실은 아수라장이었다. 가구들은 엉망진창으로 뒤집혀 있었고, 액자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컵은 바닥에서 깨진 파편들을 흩뿌리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는 싱크대 문이 덜컥거리며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식기들이 허공에서 서로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 한 여자가 벽에 몸을 바싹 기댄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벌벌 떨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의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서.
“이봐요! 괜찮으세요?” 내가 황급히 다가가려 하자, 허공에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밀쳐냈다. 나는 휘청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크헉!”
“서아, 조심해! 사념체가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했어!” 묘령이 내 주위를 맴돌며 경고했다.
그제야 나도 눈치챘다. 이 아파트 안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은 확연했다. 마치 집 전체가 살아있는 악몽처럼 뒤틀리고 있었다. 거대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이 공기 중에 뒤섞여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누, 누구세요…?” 여자가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나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왔어요!”
그 순간, 부엌에서 식칼 하나가 튀어 나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벽에 박혔다. 위협적이었다. 이건 단순한 유령이 아니었다.
“상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아무래도 이서아 양의 평범한 모습으로는 곤란하겠어.” 묘령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하아… 정말 이런 곳에서 변신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손목의 팔찌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내 몸을 감싸 안고, 주변의 어둠을 밀어냈다. 푸른색과 은색이 뒤섞인 마법진이 내 발아래에서 회전했다.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빛나고, 몸에는 별빛 무늬가 새겨진 전투복이 순식간에 착용되었다. 손에는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별빛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진실을 밝히는 별의 수호자! 이서아!”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파트 안을 휘감고 있던 기괴한 에너지들이 잠시 움찔하는 듯했다. 여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일말의 희망이 서려 있었다.
“저… 저게… 뭐예요?” 그녀가 간신히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보였다. 공기 중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같은 형상.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먹물처럼 이리저리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형화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묘령, 대체 저게 뭐야? 그냥… 감정 덩어리야?” 내가 지팡이를 굳게 잡고 물었다.
“정확히는 감정이 현실에 너무 깊이 침식해서 물질화된 ‘사념의 잔재’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주체의 감정이 폭주하면 이렇게 될 수 있지. 저 여자에게서 나오는 절망이 저것을 키우고 있는 거야. 그 여자의 공포와 슬픔을 먹이 삼아.”
묘령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저 여자의 절망이 저 괴물을 키우고 있다고?
내가 지팡이를 들고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마력을 집중했다. “여기서 더 이상 난동을 피우게 둘 수는 없어!”
내 지팡이 끝에서 은색 별빛이 한 줄기 뻗어 나갔다. 빛은 그림자를 향해 곧장 날아갔지만, 그림자는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한데 뭉쳐 내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오히려 더욱 거대하고 불길한 형태로 꿈틀거렸다.
“크흐흐… 큭….”
갑자기 주변의 깨진 파편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조각, 유리 조각, 심지어 부엌의 식기들까지! 그것들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나며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안 돼!”
나는 황급히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장막을 펼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장막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 틈을 타 검은 그림자가 엄청난 속도로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것은 여자의 몸속으로 파고들 기세였다.
“막아, 서아! 저게 몸속으로 들어가면 정말 큰일 난다!” 묘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내 온몸의 마력을 끌어모아 강력한 별빛의 폭풍을 일으켰다.
“여기서는… 더 이상 누구도 상처 입힐 수 없어!”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검은 그림자를 강타했다. 그림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림자의 일부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는 것이 보였다. 더욱 빠르고, 더욱 집요하게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안 된다. 저것을 여기서 막지 못하면, 이 아파트는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누군가의 절망이 만들어낸 괴물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나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한 발짝 더 나섰다.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내 모든 마력을 폭발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이 절망의 그림자를 멈춰 세워야만 했다.
나의 지팡이 끝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별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