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숲의 속삭임**
한유진은 고요한 숲의 심장부에 위치한 녹지연구소에서 밤을 맞았다. 유리창 너머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울창한 수풀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장막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연구실만 외롭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리 비커 안에서 형광빛을 내는 이끼, 접시 위에서 푸른색으로 깜빡이는 버섯 포자들만이 그녀의 유일한 동반자였다.
‘정말 이런 곳에… 그 꽃이 있을까?’
유진은 손에 든 오래된 식물 도감을 내려다봤다. 낡은 종이 위에는 흐릿한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환영초’. 전설 속의 꽃이었다. 밤에만 피어나고, 그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고 했다. 하지만 유진은 미신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녀에게 환영초는 미지의 유전자를 가진, 생물학적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 고립된 연구소로 오게 된 이유도 오직 그 환영초 때문이었다.
똑. 똑.
창문 밖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빗방울인가 싶었다. 하지만 하늘은 맑았다.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대한 나무 그림자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익숙했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그림자 사이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지?”
유진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곤충인가, 아니면 이 숲에 사는 희귀 동물일까? 그녀는 창가로 다가섰다. 차가운 유리가 손끝에 닿았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정적은 귀청이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연구소는 방음시설이 완벽해서 외부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연구소 주변에는 높고 튼튼한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울타리 바로 바깥쪽, 눅눅한 흙바닥에 이상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짐승의 발자국 같지는 않았다. 세 개의 길쭉한 발가락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그 발가락 끝은 날카로운 발톱이 아닌 매끈한 피부로 마무리된 듯했다. 마치… 인간의 손가락과 흡사하면서도 훨씬 더 길고 가느다란, 무언가의 흔적이었다.
유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숲에는 알려진 맹수도, 심지어 대형 조류조차 거의 없었다. 이곳의 생태계는 너무나 원시적이고 독특해서, 외부 침입자에게는 죽음과도 같았다. 그런데 이런 흔적이라니.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피곤해서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실험 도구를 정리하고 연구실 문을 잠갔다. 숙소로 향하는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낡은 형광등이 깜빡이며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매 발걸음마다 자신의 발소리가 과장되어 들리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숲은 어제의 긴장감을 말끔히 씻어낸 듯 평화로웠다. 해는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내리며 숲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유진은 잠시 불안했던 마음을 접어두고 평소처럼 야외 조사에 나섰다. 어제 발견한 발자국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밤새 비가 내렸던 탓일 것이다. 안도감과 동시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스쳤다.
환영초의 서식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연구소에서 북서쪽으로 약 2시간 거리였다. 희귀한 약초와 신비로운 형광 이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유진은 익숙하게 주변 식물들을 채집하고 데이터를 기록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새소리가 멎었다. 바람 소리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마치 숲 전체가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배낭에서 칼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아주 미세하고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분명 어딘가에 무언가가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숲은 그저 빼곡한 녹색 벽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오래된 자작나무 줄기 뒤편. 그림자가 유독 짙게 드리워진 곳이었다.
유진은 숨을 멈췄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찰나의 순간, 그 그림자를 꿰뚫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피부는 희다 못해 푸른빛이 감돌았다. 눈은 깊은 밤하늘처럼 새까만데, 그 안에는 별빛처럼 미세하게 빛나는 점들이 박혀 있었다. 온몸은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길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유려하고 힘찬 선을 가지고 있었다. 숲의 모든 생명력이 응축된 듯한,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존재였다.
그것은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숨길 필요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숲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현자처럼, 혹은 막 깨어난 아득한 고대의 존재처럼.
유진은 얼어붙었다. 공포와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녀의 심장이 마치 심해의 압력에 짓눌린 듯 아파왔다. 그 존재의 눈빛은 너무나 깊고,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유진은 자신이 한낱 먼지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누구죠?” 유진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목이 바싹 말라붙었다.
그 존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눈을 깜빡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그 길고 가는 손가락이 허공을 스쳤다. 마치 유진이 들고 있던 식물 도감을 가리키는 듯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도감을 들어 올렸다. 낡은 종이 위에는 환영초의 그림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 순간, 그 존재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미소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하면서도 매혹적인 표정이었다.
그리고 낮은 속삭임이 숲을 울렸다. 바람 소리처럼 희미했지만, 유진의 귓가에는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다.
*‘…카이.’*
그것이 자신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카이’. 그 이름은 마치 숲의 숨결처럼 유진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유진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존재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공포는 여전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끌림이 그녀를 지배했다.
“카이… 당신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숲이 흔들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카이의 모습이 일렁였다.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진은 텅 빈 자작나무 줄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숲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도감, 그리고 심장이 터질 듯한 고동은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욕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숲 속에서, 유진은 금지된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