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신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먼지가 도심을 영원히 감싸 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늘은 늘 눅진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해는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그 존재를 희미하게 알릴 뿐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죽은 자들의 무덤 위에서 간신히 숨 쉬는 거대한 괴물과도 같았다.

내 이름은 지훈.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혹은, 살아남아 있었다. 매일이 사슬이었다. 목을 조르는 보이지 않는 사슬이자, 발목을 묶어두는 끈적한 구속이었다.

오늘도 나는 무너진 아파트 단지의 잔해 속을 헤치고 있었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들이 이빨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한때 사람들이 살았던 따뜻한 공간은 이제 음침한 골짜기가 되어, 바람이 불 때마다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를 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낮게 중얼거렸다. 어제 찾은 낡은 통조림 하나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곰팡이와 함께 반쯤 썩어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 가방은 텅 비어 있었고, 허기는 내장을 갉아먹는 듯했다.

끼이익, 끼이익.

오래된 철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였다. 조심스럽게 폐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 로비는 마치 거인의 입속 같았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별처럼 흩어져 있었지만, 그 별은 생명을 잃은 죽은 별이었다. 벽에는 곰팡이가 검은 문신처럼 번져 있었고, 이따금 알아볼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죽기 전에 남긴 광기의 흔적일까.

내 손전등 불빛이 희미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나는 익숙하게 복도를 따라 걸었다. 예전엔 이곳이 은행이었다. 텅 빈 금고에서 뭐라도 나올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물론,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큭, 큭.”

목울대에서 마른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기어린 웃음이었다. 이따금씩 이렇게 혼자 웃는 버릇이 생겼다. 웃지 않으면,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내 발소리가 아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놈들은 대개 밤에 나타났다. 어스름한 핏빛 해가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으면, 비로소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어둠이 완전히 짙어지기 전이었다.

“누구…냐.”

목소리는 간신히 새어 나왔다. 내 손은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낡은 총을 더듬었다. 탄창에 남은 총알은 겨우 세 발. 아껴야만 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복도 저편,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사람의 형상과는 달랐다. 육중하고, 삐걱거리는 나무줄기 같기도, 축축한 돌무더기 같기도 했다. 놈에게선 썩은 생선 비린내와 오래된 피 냄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화학약품 냄새가 뒤섞여 풍겼다.

놈이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그것은 인간의 뼈와 짐승의 가죽,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물질들이 뒤엉킨 거대한 덩어리였다. 팔은 셋이었고, 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머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대신 몸통 한가운데에 여러 개의 눈알들이 무질서하게 박혀 있었다. 각기 다른 방향을 응시하는 눈들은 나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놈의 몸체에서는 끈적한 체액이 흘러내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내 시야가 순간 일렁였다. 놈을 똑바로 보는 것은, 마치 비정상적인 색깔의 빛을 응시하는 것과 같았다. 내 뇌가 그 형태를 인지하길 거부했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놈이 나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때 놈의 몸체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쉬이익, 끅끅, 삐걱. 마치 죽어가는 기계가 내는 소리 같았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총을 뽑았지만, 과연 저런 존재에게 총알이 통할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 이 빌어먹을 괴물!”

방아쇠를 당겼다. 탕! 둔탁한 소리와 함께 총알이 놈의 몸통 한가운데 박혔다. 놈의 몸체가 잠시 일렁이는 듯했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였다. 오히려 놈의 몸체에 박힌 눈알들이 모두 나를 향했다.

쉬이이익!

놈의 몸체 한가운데에서 촉수 같은 것이 튀어나와 바닥을 후려쳤다. 콘크리트 바닥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놈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나는 방향을 틀어 건물 안쪽으로 더 깊숙이 도망쳤다. 놈은 느렸지만, 끈질겼다. 놈의 기분 나쁜 발소리가 내 등 뒤를 쫓아왔다.

숨을 헐떡이며 복도를 달렸다.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액자들이 놈의 몸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나는 이 낡은 건물의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식량을 찾아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곳이었으니까.

도착한 곳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놈이 지하로는 따라 내려오지 못하리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일단 도망칠 곳은 이곳뿐이었다. 비상구 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들었다. 철컥! 문이 뒤에서 닫혔다.

나는 어둠 속을 더듬어 계단을 내려갔다. 곰팡이 냄새가 더욱 역하게 풍겼다. 지하 깊은 곳에서 축축한 공기가 나를 덮쳤다. 손전등을 켰다. 빛이 닿는 곳마다 거미줄과 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마침내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한때는 지하 주차장이었을 곳. 하지만 지금은 거대한 습지로 변해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쉬이이익… 끅끅…

젠장, 놈이 따라왔다!

나는 벽을 따라 뛰었다. 어둠 속에서 놈의 실루엣이 보였다. 놈은 계단을 거대한 촉수로 후려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철제 난간이 부러지고, 콘크리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였다. 내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인가? 아니, 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끈적했다. 손전등을 비추자, 혐오스러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 전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진흙으로 덮여 있었다. 진흙 속에서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진흙이 아니었다. 수많은 작은 유기체들이 뒤엉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살아있는 진흙이었다. 나는 그 진흙 위를 밟고 있었다. 역겨움에 토할 것 같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대체…”

내 정신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벽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낯선 언어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푸른색 빛이었다. 마치 오래된 신호등처럼 깜빡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빛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혹시나 살아남은 다른 인간일까? 아니면… 놈들의 함정일까?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이대로는 죽을 뿐이었다.

빛을 향해 다가갈수록, 진흙은 더욱 끈적해지고 발이 푹푹 빠졌다. 내 부츠가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힘겹게 다리를 들어 올리며 나아갔다.

빛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것은 낡은 창고 문이었다. 문틈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녹슬고 차가운 감촉. 힘껏 잡아당기자,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그 푸른빛의 정체는…

천장 한가운데서 거대한 크리스탈 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 크리스탈은 기분 나쁜 푸른빛을 내뿜으며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크리스탈 아래에는 낡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먼지 쌓인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는 떨렸다. 살아있는 인간을 본 것이 얼마 만인가. 하지만 그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남자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차림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그의 얼굴 전체에는 이상한 문신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아파트 복도에서 보았던 기하학적 문양과 흡사했다.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하지만 그의 가슴은 희미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자, 바깥의 끈적한 진흙 괴물의 소리가 희미해졌다. 창고 안은 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크리스탈의 푸른빛만이 유일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저기… 말씀 좀 해주세요. 살아있는 거죠?”

나는 총을 내린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초점 없이 흐릿했다. 마치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혀가 마비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책들을 보았다. 손을 뻗어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낡은 가죽 표지는 눅눅했고, 제목은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자로 쓰여 있었다. 나는 책을 펼쳤다. 안에는 역시 기이한 문자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스케치 같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하에서 보았던 괴물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아니, 더 끔찍한 존재들이었다. 촉수가 돋아난 거대한 눈알, 비늘로 덮인 날개, 수없이 많은 이빨을 가진 아가리…

내 손이 떨렸다. 이것은… 금지된 지식이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 모든 재앙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나는 책을 덮으려 했지만, 내 눈은 페이지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읽지 마라… 읽으면… 놈들의 속삭임이 네 머릿속을 파고들 것이다…”

남자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침묵했던 사람처럼.

나는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당신은… 이 책을 읽었나요?”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은 더욱 짙어 보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하고…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놈들이 얼마나 거대하고…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세상이 왜곡될 수 있는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놈들은… 저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아니,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재앙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 ‘꿈틀거리는 혼돈’, ‘문턱에 서 있는 자’, ‘별들 사이의 그림자’…”

남자의 중얼거림은 점점 빨라졌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알 수 없는 형태를 그렸다. 그의 눈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잊혔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별들이 올바른 위치에 오면… 그들은 깨어난다. 그리고 우리의 세상은… 그저 한낱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는 것이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하는 말은 너무나도 황당했지만, 동시에 이 폐허가 된 세상의 모든 미스터리를 설명해주는 듯했다. 바깥의 괴물들, 핏빛 하늘, 기괴한 건축물들… 이 모든 것이 ‘놈들’의 존재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면?

“그럼… 살아남을 방법은 없는 건가요?”

나는 필사적으로 물었다. 그의 지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고 싶었다.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살아남는다고?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단지… 죽음이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을 뿐이지. 놈들은… 우리의 영혼마저 갉아먹는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 밖에서…”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책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막으려 했다. 잊혀진 지식으로 놈들의 침공을 저지하려 했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록이다. 한때는 ‘감시자’라 불렸지. 그들은 놈들의 흔적을 쫓고, 그 존재를 봉인하려 했다.”

나는 다시 책들을 보았다. 남자가 가리킨 책은 다른 책들보다 낡고 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역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했지만, 중간중간 그림으로 된 지도 같은 것이 보였다. 낡은 도시의 지형을 나타내는 지도였다. 그리고 특정 장소에 이상한 기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건… 뭐죠?”

남자는 내 손에 들린 책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봉인… 봉인의 장소다. 그들은 놈들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장벽’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성공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벽이라니요?”

“이 세상은 놈들의 ‘존재’만으로도 오염된다. 그 오염을 막아주는 일종의 ‘막’을 설치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아니,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성공했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남자의 말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다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 손에 들린 책과 지도만큼은 선명했다. 지도에는 내가 지금 있는 이 지역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기괴한 건물, 그리고 내가 피했던 괴물들이 지나다니는 길목도 표시되어 있었다. 봉인의 장소라고 표시된 곳은… 이 도시의 가장 깊숙한 곳, 사람들이 ‘금단의 구역’이라고 부르며 피하던 곳이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탑이 하나 서 있었다. 기이한 모양의 검은 탑. 한 번도 가까이 가본 적은 없었다. 그곳에 접근했던 사람들은 모두 미쳐버리거나, 끔찍한 형태로 변해버렸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저 탑이 봉인의 장소라면…”

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만약 저 탑이 놈들의 영향력을 막아주는 장벽이라면? 어쩌면 이 세상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자는 내게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크리스탈의 푸른빛 속에서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책을 가방에 넣었다. 바깥에서 다시 끈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놈이 아직 포기하지 않고 문 앞에서 서성이는 듯했다.

나는 남자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기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육체만 남아있을 뿐, 그의 영혼은 이미 놈들의 속삭임에 잠식당했을 터였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내가 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고맙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창고의 다른 쪽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희미하게 빛이 스며드는 낡은 환기통이 있었다. 좁고 위험한 길이었지만, 바깥의 괴물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환기통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나를 감쌌다. 등 뒤로 남자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 손에는 지도와 책이 있었다. 금지된 지식, 그리고 어쩌면 한 줄기 희망을 담고 있는.

환기통을 기어가는 동안, 나는 내 손에 든 낡은 사진을 만졌다. 빗물에 희미해진 미소의 소녀. 나의 마지막 이성, 나의 마지막 목표.

“끝까지 가볼 거야. 반드시.”

내 입술에서 결연한 다짐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나는 이 끔찍한 세상의 진실을 알아버린 대가로, 머지않아 저 남자처럼 광기에 잠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숨 쉬고 있었고, 내 발은 움직이고 있었으며, 내 손에는 총이 있었다. 그리고 내 심장 속에는 작은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금단의 구역으로 향했다. 그 거대한 검은 탑으로. 그곳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이 끔찍한 악몽의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앞으로의 길은 분명 더 위험하고, 더 잔혹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녀의 미소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나는 이 빌어먹을 세상의 끝을 보고야 말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는 묵묵히 기어갔다. 놈들의 속삭임이 이미 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