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고대의 맥동
황량한 크레바스 사이로 거대한 기체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스쳤다. 철컥, 콰앙! 금속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바위 파편들이 빗발쳤다. 강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조종석 안은 이미 경고음으로 가득했다. 빨간 불빛이 깜빡이는 계기판은 마치 자신의 처참한 상태를 비웃는 듯했다.
“젠장… 너무 깊이 들어왔어.”
진우의 전술 메카, ‘돌개바람’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팔 부분은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갔고, 다리 하나는 비틀려 제대로 보행조차 힘든 상태였다. 겨우 잔존하는 추진력으로 무너져가는 고대 구조물 사이를 비틀거리며 내달렸다. 그의 뒤를 쫓는 거대한 그림자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저것은 단순한 기체가 아니었다. 저 거대한 육중함, 칠흑 같은 외장,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굉음.
‘흑룡.’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전술 메카 중 하나.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가진 괴물. 진우의 돌개바람은 흑룡에게 있어 한낱 모기떼에 불과했다. 애초에 교전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였다. 그저 도망치고, 또 도망칠 뿐. 하지만 이제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진우는 무너진 도시의 심장부, 정확히는 수천 년 전 잊힌 문명의 흔적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유적지로 강제로 밀려들어갔다. 사방은 거대한 석상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래된 신전의 잔해 같은 곳이었다. 돌개바람의 스캐너가 불규칙한 에너지 파동을 감지하고 경고음을 울렸다.
“뭐지? 이런 곳에… 이런 에너지가?”
진우의 의아함도 잠시, 흑룡이 뒤따라 유적 안으로 난폭하게 침입했다. 거대한 발이 고대 석상을 짓밟으며 굉음을 냈다. 흑룡의 조종사, 제국군 ‘철혈’ 사단 소속의 에이스 파일럿 ‘카이젤’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찢고 들어왔다.
“고작 이런 곳에 숨어들다니, 반란군 쥐새끼답군. 강진우, 네놈의 돌개바람은 여기서 끝이다.”
카이젤의 비웃음이 진우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반박할 힘도 없었다. 돌개바람은 완전히 멈춰 섰다. 시스템 전체가 오류를 뿜어냈다. 방어막은 이미 소멸했고, 무기 시스템도 먹통이었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움켜쥐었지만, 기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흑룡의 거대한 팔이 서서히 올라왔다. 팔 끝에 달린 거대한 플라즈마 캐논이 섬뜩하게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대로 끝인가. 돌개바람과 함께, 여기서 산화하는 건가.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동료들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의 미소.
분했다. 너무나도 무력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조종간을 내리쳤다.
“이대로는… 안 돼! 아직…!”
그때였다.
돌개바람의 조종석 바닥에서, 그리고 기체 주변을 감싸는 고대 유적의 벽면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맥동하듯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진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조종석 내부의 모든 경고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대신, 진우의 온몸의 세포가 전율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덮쳐왔다. 마치 심장이 몸 밖에서 다시 뛰는 듯한, 아득하고 웅장한 맥박이었다.
푸른빛은 돌개바람의 외장을 감싸기 시작했다. 낡고 긁힌 철갑 위로 마치 살아있는 물결처럼 빛이 흘러갔다. 손상된 부위는 빛을 빨아들이며 재조립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아니, 재조립이 아니었다. 비틀렸던 금속이 다시 펴지고, 찢어졌던 관절부가 새로운 푸른빛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듯했다. 기체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빛을 발하며 변모했다.
“이… 이건 뭐야?!”
카이젤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흑룡의 플라즈마 캐논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주춤했다.
진우의 눈앞에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펼쳐졌다. 이해할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정보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그 정보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기체는… 더 이상 단순한 돌개바람이 아니었다.
푸른빛이 최고조에 달하자, 돌개바람의 낡은 추진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치 푸른 불꽃으로 이루어진 듯한 날개가 돋아났다. 찢겨 나갔던 오른팔에는 푸른 에너지가 뭉쳐 강력한 형태의 주먹이 만들어졌다. 기체는 마치 거대한 심장을 가진 것처럼 우웅, 하고 낮은 소리를 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조종간을 움직였다.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기체가 그의 의지에 따라, 마치 자신의 사지처럼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무게감은 사라지고, 존재 자체가 가벼운 영혼처럼 변했다.
“헛된 발악이다! 그런 장난감으로…!”
카이젤은 혼란 속에서도 다시 플라즈마 캐논을 조준했다. 흑룡의 거대한 주포가 다시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진우의 시야에 흑룡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처럼 들어왔다. 그의 의지대로 돌개바람이, 아니, 새로운 존재가 움직였다.
푸른 섬광!
돌개바람은 유적의 천장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중력의 제약을 무시하는 듯, 수직으로 상승하는 움직임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플라즈마 캐논의 섬광이 뿜어져 나오기도 전에, 돌개바람은 이미 수십 미터를 이동해 있었다. 그것은 도약이 아니었다. 순수한 ‘이동’이었다.
“뭐라고?!”
카이젤의 경악이 통신망을 울렸다.
진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것은… 마법인가? 아니, 기계가 어떻게…!
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었다. 몸이, 기체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움직였다.
돌개바람의 푸른 팔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마치 공간을 꿰뚫는 듯한 속도로 흑룡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콰앙! 금속의 찢어지는 소리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흑룡의 단단한 외장이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푸른 에너지의 파동이 흑룡의 내부로 스며들며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크윽… 이딴 게…!”
카이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흑룡은 휘청거렸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힘은 무한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과 기체가 하나가 되어 맥동하는 이 고대의 힘은,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 안에 끝내야만 했다.
돌개바람은 흑룡의 위로 날아올랐다. 푸른 불꽃의 날개가 찬란하게 빛났다.
고대의 맥동이 기체의 모든 세포를 깨웠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진우는 다시 한번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확신만이 남아있었다.
“간다, 흑룡!”
돌개바람의 푸른 잔상이 유적의 어둠을 가르고 흑룡을 향해 내리꽂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