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빛이 눈꺼풀 안쪽을 휘저었다. 익숙한 감각. 흐릿한 경계 너머로 모래시계가 뒤집히는 환영이 스쳐갔다. 이마를 짓누르던 답답함이 사라지고, 온몸을 감싸던 차가운 캡슐의 기운 대신 햇볕의 온기가 느껴졌다. 감았던 눈을 뜨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젠장, 또 시작이군.”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나무 침상, 거친 짚단 이불, 벽에 걸린 낡은 홑이불. 단칸방은 내가 살던 쥐구멍보다 조금 나을 뿐, 여전히 가난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뿌연 먼지가 휘날리고,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은 거대했지만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은 ‘에테르나 크로니클’. 온갖 환상과 모험이 펼쳐진다고 홍보하던 거대 가상현실 게임의 시작 지점, ‘서민 구역’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다른 유저들이 휘황찬란한 도시나 신비로운 숲에서 시작할 때, 나는 언제나 낡은 판잣집 아니면 허름한 여관방에서 눈을 떴다. 그것도 그냥 가난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가장 낮은 계층, ‘최하층민’으로.
손등을 스쳐 지나가는 투명한 창.
<시스템: 당신은 '촌부 한결'로 접속했습니다.>
<현재 소속: 아스타르테 제국, 루멘 지구 최하층민>
<현재 명성: 서민 -100 (제국 내 평판이 극히 낮습니다.)>
“젠장, 명성 수치는 또 왜 떨어져 있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분명히 50이었는데.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없는데 툭하면 떨어지는 명성 수치는 이 세계에서 최하층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주는 지표였다. 제국의 가장 말단, 언제든 착취당하고 무시당해도 되는 존재. 그게 나였다.
침상에서 내려와 낡은 나무 탁자 위를 뒤적였다. 쪽지 하나.
[길드 아지트 유지비 징수: 황금 20닢. 기한 오늘 자정까지. -길드 관리인 에르윈-]
“20닢?”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 인벤토리에는 고작 은화 5닢이 전부였다. 황금 1닢은 은화 100닢과 같으니, 황금 20닢이면 은화 2000닢. 내가 하루 종일 개미처럼 일해도 벌기 힘든 돈이었다. 길드 유지비라는 명목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돈을 뜯어가는 건 사실상 제국의 노골적인 착취나 다름없었다. 길드는, 게임을 하는 유저들이 만든 조직을 뜻하지만, 이곳에서는 ‘최하층민 거주 공동체’를 의미했고, 그마저도 제국이 ‘관리’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가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낡은 무명옷을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확 끼쳐왔다. 좁은 골목길은 햇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축축한 바닥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널려 있었고, 그 사이를 비루먹은 개들이 어슬렁거렸다. 저 멀리, 철혈 병사들의 쩌렁쩌렁한 구령 소리가 메아리쳤지만, 이곳까지는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한결이 왔어? 오늘도 힘들겠네.”
옆집 촌부 ‘마리안’ 아주머니가 문간에 기대어 앉아 실을 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눈빛은 이미 삶의 고단함에 지쳐 있었다.
“네, 아주머니. 아주머니도 일찍 나오셨네요.”
“응, 오늘은 시장에 들고 갈 약초를 캐야 해서. 병사들이 이 골목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나갔다 와야지. 또 뭘 트집 잡을지 몰라서.”
마리안 아주머니의 말에 내 시선은 자연스레 골목 입구 쪽으로 향했다. 험악한 표정의 철혈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다가가 짐 보따리를 뒤지거나, 거친 말로 위협하기도 했다. 그들의 갑옷은 번쩍였고, 창 끝은 언제나 날카롭게 빛났다. 최하층민에게 그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퀘스트: 에르윈에게 길드 유지비 전달 (0/20 황금)>
<보상: 없음>
<실패 시 패널티: 명성 -200, 길드 아지트 강제 폐쇄, 강제 이주>
이주? 이곳에서 쫓겨나면 갈 곳은 없었다. 이 게임에서 ‘길드 아지트’는 단순한 거점이 아니라, 최하층민이 유일하게 발붙일 수 있는 공동체이자 생존 그 자체였다. 명성 -200이면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을 터였다. 그들에게는 사소한 일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젠장, 어떻게 구한담.”
나는 투덜거리며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허드렛일, 채집, 아니면… 남들이 꺼리는 위험한 일.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20 황금을 벌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리에 나서자마자 온갖 악취가 코를 찔렀다. 썩은 음식물 냄새, 가축 분뇨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여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낡은 마차가 삐걱거리며 지나가고, 행인들은 서로에게 부딪히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저 멀리 빛나는 제국의 상징, 거대한 황제궁은 마치 다른 세계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 높은 성벽과 화려한 지붕, 그 위에 펄럭이는 독수리 문양의 깃발은 이 도시의 모든 부와 권력이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급한 대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뒷골목에서 들려왔다.
“이 거지 같은 놈이! 제국 세금을 떼먹으려 들어?”
“아닙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아이가 아파서…!”
끌려가는 남자의 애원과 병사들의 매서운 채찍 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벽에 바싹 붙어 고개를 빼꼼 내밀자, 두 명의 철혈 병사가 깡마른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그의 손에는 빈 전대만이 들려 있었다.
“네놈 같은 하찮은 쓰레기에게 자비란 없다! 본보기로 끌고 가라!”
병사들은 남자를 끌고 억지로 마차에 태웠다. 마차 안에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도 세금을 내지 못했거나, 제국 법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일 터였다.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이겠지. 그곳에 끌려가면 시체가 되어 돌아오거나,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들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광경에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시스템 메시지 창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퀘스트도 아니고, 이벤트도 아니었다. 그저 이 세계의 일상이었다. 최하층민에게는 매일매일이 이런 폭력과 착취의 연속이었다.
<경고: 제국 병사에 대한 적대 행위 시, 명성치 급락 및 강력한 제재가 가해질 수 있습니다.>
내 눈앞에 섬광처럼 나타난 경고 메시지가 나의 분노를 식혔다. 그래,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곳에서는 최하층민의 목소리는 먼지보다도 하찮았다.
몸을 돌려 다시 걸었다. 하지만 방금 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렇게 끌려간 사람은, 그리고 남겨진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될까? 문득 내 앞의 마리안 아주머니의 지친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언제든 저렇게 끌려갈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제국은 거대했다. 그리고 잔혹했다.
수많은 영웅들이 이 세계를 구원한다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황제궁의 화려한 파티에 초대받거나, 고위 귀족의 용병이 되어 던전을 탐험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먼지 낀 골목길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최하층민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일 뿐이었다.
“젠장, 20 황금이라니… 말도 안 돼.”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당장 오늘 밤까지 20 황금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드 아지트가 폐쇄되고, 나는 이 세계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강제 이주? 그게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막연한 분노와 절망감, 그리고 어쩌면… 아주 희미한 반항심이 불씨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끌려가는 삶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건 나답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황제궁을 향해 뻗은 대로변에는 귀족들의 마차가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번쩍이는 보석과 비단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마치 다른 종족 같았다. 그들이 한 번 흥청망청 쓰는 돈이면 최하층민 몇 가구가 몇 달을 먹고 살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그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내비게이션에 퀘스트 마커가 깜빡였다. 길드 관리인 에르윈. 그에게 가서 사정이라도 해볼까? 아니, 소용없을 것이다. 에르윈은 제국의 앞잡이일 뿐, 최하층민의 사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황금빛 노을이 잿빛 도시를 잠시나마 물들였다가, 곧이어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멀리서 종탑의 종소리가 일곱 번 울렸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한 첫 번째 싸움에 직면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상대는, 눈앞의 난관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장 위험하고, 가장 어둡고,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슬럼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뒷골목의 어둠이었다.
생존을 위해, 어쩌면 이 세계를 뒤흔들 반란의 작은 씨앗이 될지도 모를 첫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