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골, 그곳은 이름처럼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하늘도, 땅도, 심지어는 사람들의 얼굴까지도. 천룡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잿빛골 광부들은 매일같이 땀과 피를 바쳐 지하 깊은 곳의 광물을 캐냈다. 그들의 노동은 제국의 찬란한 수도를 밝히는 빛이 되었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오늘은 달랐다. 갱도를 울리는 채굴기의 굉음마저 침묵한 오후, 마을 어귀에 거대한 강철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군의 ‘섬멸자’ 기체들이었다. 세 대의 섬멸자는 육중한 발걸음으로 잿빛골의 흙바닥을 다지며 전진했다. 번쩍이는 강철 장갑, 어깨에 장착된 위협적인 캐논포, 그리고 흉터처럼 새겨진 제국의 문장. 공포의 상징이었다.
“모두 나와라! 세금 징수 시간이다!”
섬멸자 중 한 대가 거친 금속음성으로 외쳤다. 그 말에 광부들은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이미 가진 것을 몽땅 빼앗기고도 빚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항은 곧 죽음이었다.
강민은 낡은 오두막 그림자 속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격렬하게 울렸다. 매번 똑같았다. 제국군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그의 눈동자에 뜨거운 분노가 일렁였다.
“이게 다 뭐냐! 지난달에 다 바쳤는데!”
누군가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소리쳤다. 나이 든 광부, 이웃집의 김 영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삶의 무게가 짓눌려 있었다.
쿠웅!
섬멸자 한 대가 김 영감의 발치에 거대한 철퇴를 내리찍었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고, 김 영감은 비틀거렸다.
“천룡 제국의 법은 절대적이다, 늙은이. 반항은 오직 죽음만을 불러올 뿐.” 섬멸자의 조종석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오늘부터 광물 할당량은 20% 인상이다. 그리고 이 마을의 모든 식량은 제국에 바쳐야 한다. 남김없이!”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식량마저 빼앗기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간신히 버텨온 그들의 삶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했다.
강민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은 안 돼.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몇 년 전, 그의 부모님 역시 이 제국의 탐욕 때문에 굶어 죽었다. 그는 그때부터 다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 거대한 괴물에게 맞서겠다고. 그리고 그 ‘언젠가’는 바로 지금이었다.
“강민!”
낡은 오두막 뒤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백발의 노인, 마을의 어른이자 강민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인 ‘석 노인’이었다. 그는 강민에게 눈짓했다. ‘때가 됐다’는 침묵의 신호였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속에 갇혀 있던 뜨거운 용암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는 오두막 뒤편의 좁은 샛길로 빠르게 몸을 숨겼다. 잿빛골 외곽의 낡은 폐광 갱도. 그곳이 그의 비밀스러운 안식처이자, 동시에 제국에 맞설 유일한 희망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눅눅한 흙냄새와 기계 기름 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마침내 갱도의 끝, 거대한 강철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민은 미리 입력된 암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자,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를 맞이했다.
길이 15미터, 높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전투병기. ‘질풍’이었다. 표면은 세월의 흔적으로 거칠었지만, 강민이 직접 갈고 닦아 복원한 흔적이 역력했다. 닳아 해진 장갑 여기저기에는 강민이 직접 만든 강화 패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제국의 섬멸자들에 비하면 조악하고 투박했지만, 이 안에 담긴 기술력은 천룡 제국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오래전 잊힌 고대 문명의 유산, 이 행성을 지켰던 전설적인 수호자. 그의 아버지도 이 기체를 타고 싸우다 스러져갔다.
“아버지… 이제 제가 이을 차례입니다.”
강민은 조종석에 몸을 싣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지이잉-!
묵직한 진동과 함께 ‘질풍’의 거대한 엔진이 깨어났다. 투박한 조종간과 레버들이 그의 손에 익숙하게 잡혔다. 조종석 전면의 모니터에 외부 풍경이 선명하게 비쳤다. 잿빛골 마을. 그리고 광부들을 억압하는 세 대의 섬멸자들.
“이것들이 감히…!”
분노가 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쾅!
‘질풍’이 폐광 갱도의 강철 문을 부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굉음과 함께 흩뿌려지는 먼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솟아오른 잿빛 기체. 마을 사람들과 제국군은 모두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저, 저건…!”
섬멸자 조종사의 기계음 섞인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의 눈에는 불가능한 존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제국이 수십 년간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던, 고대 병기의 파편이 바로 여기에.
강민은 조종간을 틀었다. ‘질풍’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섬멸자 한 대. 그는 오른팔에 장착된 거대한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두!
화염을 뿜으며 강철 탄환들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섬멸자 한 대가 급히 방어막을 올렸지만, ‘질풍’의 포격은 강력했다. 방어막이 부서지고, 장갑이 찢겨나가며 스파크가 튀었다.
“크아악! 공격받는다! 반격해!”
제국군 조종사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두 대의 섬멸자가 ‘질풍’을 향해 캐논포를 발사했다. 거대한 에너지탄이 강민을 향해 날아왔다.
“어림없지!”
강민은 조종간을 꺾어 ‘질풍’을 옆으로 날렵하게 피했다. 고대의 기체는 제국의 최신 병기보다 훨씬 유연하고 빨랐다. 섬멸자의 에너지탄은 허공을 가르고 잿빛골 외곽의 바위산을 강타했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강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회피와 동시에 ‘질풍’의 왼팔에 숨겨진 고열 칼날을 전개했다. 칼날은 붉은 열기를 뿜으며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쉬이이익!
그는 번개처럼 섬멸자 한 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제국군 조종사가 반응할 새도 없이, ‘질풍’의 고열 칼날이 섬멸자의 허리를 가로질렀다. 거대한 강철 장갑이 두부처럼 잘려나갔고, 내부의 전선과 회로들이 끊어지며 격렬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쿠르릉!
섬멸자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치명타였다.
“말도 안 돼! 저건 구형 기체일 뿐인데!”
남은 한 대의 섬멸자 조종사가 공포에 질려 외쳤다. 그들은 평생 제국의 압도적인 힘에 익숙해져 있었다. 평민들의 반항은 항상 손쉽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강민은 조종석에서 피식 웃었다. 구형? 맞았다. 하지만 이 ‘구형’ 기체는 제국의 철혈 지배를 끝낼 불씨가 될 터였다.
“제국의 개들아, 이제 너희의 시대는 끝났다!”
그는 ‘질풍’의 거대한 발로 쓰러진 섬멸자를 짓밟으며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공포와 경외심, 그리고 한 줄기 희망이 그들의 눈동자에 교차했다.
남은 섬멸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후퇴 신호를 보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강민은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잿빛골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승리의 소식을 제국 곳곳에 퍼뜨리는 것.
‘질풍’은 우뚝 서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민은 조종석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첫 발걸음을 뗐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고요하던 잿빛골에 반란의 불씨가 피어올랐고, 그 불씨는 머지않아 거대한 들불이 되어 천룡 제국의 찬란한 수도를 향해 타오를 것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아버지.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반드시 올 겁니다.”
강민의 눈은 잿빛이 아닌,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