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우연: 붉은 그림자
새벽 두 시, 칙칙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찌푸린 미간으로 책을 노려보던 이진우는 결국 패배를 선언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뇌가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내일 시험지에 그림이라도 그릴 기세였다. ‘망했다, 망했어.’
축 늘어진 어깨를 겨우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고시원 방을 벗어나 찬 공기라도 좀 쐴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로등만이 듬성듬성 길을 밝히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편의점 진열대 채우는 소리만이 유일한 생명 신호 같았다.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데, 으스스한 적막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샥… 샥…’ 마치 뭔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름한 상가 건물 뒤편, 어둠이 짙게 깔린 곳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누, 누구세요?”
조심스럽게 묻자,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뿅 튀어나왔다. ─ 아니,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실려 허공에서 물결치는 여인이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칼은 마치 불꽃 같았고, 사슴처럼 커다란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진우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입술은 꼭 덜 익은 체리 같았다. ─ 아니, 지금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지.
“저기… 밤늦게 여기서 뭐 하세요?” 진우가 다시 물었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깐… 잠깐 들른 거예요.”
말끝이 흐려졌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옷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마치 방금 무도회라도 갔다 온 사람 같았다. 이런 밤중에, 이런 골목에서? 아무리 봐도 수상한 조합이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시간에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 아니면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요?” 진우는 경계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녀가 위태로워 보인다는 생각에 오지랖을 부리고 있었다.
여인은 진우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제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려서요. 저기, 저 벽 틈새로 들어갔는데… 아무리 해도 나오지가 않네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낡은 상가 건물의 벽 틈새였다. 너무 좁고 깊어서 사람 손이 들어갈 리 만무했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틈새를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뭘 잃어버리셨는데요?”
“음… 그게… 아주 귀한… 반짝이는 조약돌이에요!”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가문의 보물이라서… 꼭 찾아야 해요.”
‘가문의 보물인데 조약돌? 게다가 반짝이는?’ 진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것 같았다.
“저기…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데요.” 진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여인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아니에요! 분명히 저기 있었어요! 작은… 반딧불이 같은 빛이… 휙 하고 들어갔단 말이에요!”
순간 진우는 그녀의 눈이 찰나의 순간 금빛으로 번뜩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순식간이라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싶었다.
“혹시…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진우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이대로 집에 돌아가도 잠 못 들 것 같았다.
“정말요?” 여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너무나 환한 미소에 주변 어둠이 잠시 걷히는 듯했다.
진우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틈새를 비췄다. 손전등 빛에 반사되어 먼지만 뿌옇게 보일 뿐, ‘반짝이는 조약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없는데… 혹시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틈새에 얼굴을 바싹 댔다. “분명히 있어요! 제 기운이 느껴져요! 아, 잠시만요… 조금만 더….”
그녀가 벽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사람이 아니라 ─ 마치 냄새로 무언가를 찾는 짐승 같았다. 진우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기… 혹시 괜찮으세요?”
“아, 네! 걱정 마세요!” 여인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흐음…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네요.” 그녀는 뜬금없이 손을 뻗어 진우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 어딜 잡으세요?”
“잠깐만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 죄송해요.” 그녀는 손을 황급히 거뒀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진우는 그녀의 손길이 마치 불꽃처럼 뜨거웠던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게다가 묘하게 끌어당기는 듯한 기운도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요.” 여인은 깊은 한숨을 쉬며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은 너무나 깊고 알 수 없었다. “저, 이진우 씨. 저와 인연을 맺으시겠어요?”
“네?” 진우는 어이없는 질문에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이진우 씨 맞으시죠?” 여인이 진우의 얼굴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숨결에서 미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저는 여라라고 해요. 이 근처에 살고 있죠. 오늘 이 인연을…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저기… 저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그리고 인연이고 운명이고… 갑자기 무슨… 저기요!”
여라는 진우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 눈 깜짝할 새였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무언가가 솟아나더니, 이내 부드러운 하얀 털로 뒤덮인 쫑긋한 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끼 귀 같기도 하고, 강아지 귀 같기도 한, 하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운 귀였다. 그 귀는 밤하늘의 별빛을 받아 아스라이 빛났다.
진우는 눈을 비볐다. ‘잘못 봤나? 피곤해서 환각이 보이나?’ 하지만 아무리 비벼도 그 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뒤쪽으로 ─ 분명히 ─ 부드럽게 흔들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길고 풍성한, 붉은빛이 감도는 하얀 꼬리!
“설마… 당신….” 진우는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을 스치는 온갖 동화 속 존재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익숙한 존재가 있었다.
여라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이제 저의 정체를 조금은 짐작하시겠어요? 맞아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존재랍니다.”
그녀는 천천히 진우에게 다가왔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뒤는 차가운 벽에 닿아 있었다. 여라의 금빛 눈동자가 진우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인간인 당신과 저 같은 존재는… 함부로 엮여서는 안 돼요. 이건… 우리 종족의 엄격한 규칙이죠.” 여라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분명했다. “만약 이 규칙을 어기면… 아주 곤란해질 거예요. 당신도, 저도.”
그녀의 손이 진우의 뺨에 닿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손은 뜨거웠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공포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제가 잠시 이성을 잃고 제 본모습을 보여드렸다 한들… 내일부터는 잊어주세요. 이진우 씨는 그저 잃어버린 ‘조약돌’을 찾으려던 이상한 여자를 만났을 뿐인 거예요.”
여라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는 매혹적이었지만, 동시에 한없이 위협적이었다. 그녀의 말은 분명히 협박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진우는 그 웃음에서 간절함 같은 것을 읽어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라는 몸을 휙 돌리더니 붉은 잔상만을 남긴 채 순식간에 골목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진우는 벽에 기대선 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손으로 뺨을 만져보니, 아직도 그녀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 뜨거웠다.
“여우… 여우라고?”
붉은 머리, 쫑긋한 귀, 풍성한 꼬리, 그리고 금빛 눈동자. ‘가문의 보물’이라고 했던 ‘반짝이는 조약돌’은 아마도 그녀의 여우 구슬이었을 것이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의 기이한 만남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설렘과 함께, 잊지 못할 붉은 그림자가 깊게 새겨졌다.
‘잊어달라니…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진우는 슬며시 웃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지루하고 반복되던 그의 일상에,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매혹적인 방식으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 이상 축 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기대감에 가볍기까지 했다. 과연 그는 이 ‘종족을 뛰어넘는 금지된 인연’을 외면할 수 있을까? 아니, 외면하고 싶을까? 진우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그 붉은 그림자에 홀려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