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이런 우주 오지 탐사는 내가 아니라 심심이 로봇한테 맡겨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항성간 비행선 ‘새벽별호’의 브릿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강하율 대원, 이 배의 항법사이자 탐사 담당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스크린 위로 펼쳐진 심우주의 풍경은 그저 반짝이는 점들의 향연일 뿐이었다. 감동도, 경이로움도, 이제는 지긋지긋한 일상이었다.
“강하율 대원, 또 혼잣말입니까? 우주선 내부 규율 12조, ‘불필요한 소음 발생 금지’에 저촉됩니다.”
딱딱한 목소리가 인터컴을 통해 울렸다. 윤지혁 수석 연구원이었다. 그가 언제나 그렇듯, 정확히 12조를 인용하는 걸 듣자 하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인간은 대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어이쿠, 수석님. 밤샘 연구하시다 제 콧노래에 잠이라도 깨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제 머릿속에서만 부를게요!”
하율이 약 올리듯 받아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분명 지혁은 연구실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터였다. 하율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씨익 웃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삐-비빅!
메인 스크린 중앙에 갑자기 경고음과 함께 붉은 점이 깜빡였다. 하율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여 홀로그램 키패드를 빠르게 조작했다.
“응? 이게 뭐야? 에너지 패턴이… 불규칙하다고?”
센서가 탐지한 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형태의 에너지 신호였다. 고에너지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고요한’ 에너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강하게 존재를 주장하는 역설적인 신호였다.
“수석님, 잠깐 브릿지로 와주세요! 이상 신호 탐지됐습니다!”
하율이 다급하게 외쳤다. 몇 초 후, 연구실에서 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원, 또 시시한 걸로 놀리는 겁니까? 지난번엔 외계 생명체가 컵라면 끓여 먹는 소리라고 우기더니…”
“아니요! 진짜라니까요! 이건 달라요! 좌표 E-707-델타섹터, 미확인 물체! 아니, 미확인 에너지원!”
하율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지혁은 더 이상 딴죽을 걸지 않았다. 잠시 후, 연구복을 대충 걸친 지혁이 브릿지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피곤과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어디, 보자… 강 대원의 ‘특별한 촉’이 이번엔 어떤 황당한 결과를 불러올지.”
지혁이 하율 옆에 서서 스크린을 들여다봤다. 하율은 그의 팔을 잡아끌어 스크린을 가리켰다.
“여기요! 보세요! 이런 패턴은 본 적 없을 거예요!”
지혁의 눈이 스크린 위 에너지 그래프에 고정됐다. 그의 미간이 천천히 펴지더니, 이내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건… 이상하군. 센서 오류인가? 아니, 시스템은 정상 작동 중인데.”
평소 냉철하던 지혁의 목소리에 미묘한 동요가 실렸다. 하율은 옳거니 싶어 어깨를 으쓱했다.
“봐요, 내 말이 맞죠? 캡틴한테 보고해야겠어요!”
하율이 최선우 선장에게 연결하자, 선우는 잔뜩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강 대원. 이제 막 눈 좀 붙이려고 했는데…”
“캡틴! 미확인 에너지원 탐지했습니다! 윤 수석님도 확인했어요!”
그제야 선우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위치와 특이사항 보고해라.”
새벽별호는 미지의 좌표를 향해 느리게 움직였다. 우주선 내부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편에서는 기대감이, 또 한편에서는 미지에 대한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하자, 브릿지 메인 스크린에 예상치 못한 광경이 나타났다.
“저게… 뭐야?” 서아린 통신장교의 낮은 탄성.
허공에 떠 있는 것은 검은색 구체였다. 탁구공만 한 크기였다. 매끄럽고 완벽한 구형.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고, 그렇다고 모든 빛을 흡수하지도 않는, 마치 우주 그 자체를 응축시켜 놓은 듯한 오브제였다. 그 주변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아까 하율이 탐지한 그 이상 에너지가 감돌고 있었다.
“스캔해봐.” 선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눈은 구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혁이 다급하게 키패드를 두드렸다. “전자기 스펙트럼 스캔… 반응 없음. 중력장 스캔… 반응 없음. 물질 구성… 분석 불가.”
“분석 불가라고?” 하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강 대원.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라는 뜻이지. 최소한 우리가 아는 과학의 범주 내에서는.” 지혁의 목소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아니면… 너무나도 정교해서 탐지가 안 되는 거거나.”
“아, 그럼 저게 외계 유물이라는 거예요? 헉! 혹시 막, 전 우주를 통치하는 힘을 가진 고대 종족의 무기라거나… 아니면 시간 여행 장치?” 하율은 상상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흥분했다.
지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강 대원, 진정하세요. 픽션과 현실은 다릅니다.”
“에이, 수석님은 너무 재미없어요! 맨날 과학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니…”
“과학적으로 접근해야지, 그럼 신화적으로 접근합니까?”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여전했다.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린에게 명령했다. “아린, 주변에 다른 이상 징후는 없어?”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캡틴. 이 구체 하나뿐입니다.” 아린은 무표정하게 스크린을 응시했다.
“젠장. 뭘까 저건.” 선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우선 회수한다. 회수용 드론 출동시켜.”
회수 드론이 조심스럽게 구체에 접근했다. 드론의 집게가 구체를 잡으려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칙-! 하는 기계음과 함께 드론의 팔이 일시적으로 정지하는가 싶더니, 구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표면 위로 푸른빛이 아주 잠깐, 맥동하듯 스쳤다 사라졌다.
“뭐야? 드론에 이상 신호 감지! 전력 역류!” 지혁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회수 중단! 드론 복귀시켜!” 선우가 급히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구체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던 드론이 갑자기 굉음과 함께 펑! 하고 폭발해버렸다. 드론의 잔해들이 우주 공간으로 흩뿌려졌다.
하율은 입을 쩍 벌렸다. “저, 저거… 드론이 터진 거예요? 그냥 잡으려 했을 뿐인데?”
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한 에너지 방출! 충격파는 없었지만… 드론의 모든 전자회로가 한순간에 전부 파괴됐습니다!”
고요했던 검은 구체는, 이제 그 자리에서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어떤 형태도 없이 그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닿는 새벽별호의 외벽에서, 미세한 금속성 ‘따끔거림’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캡틴… 배가… 뭔가 이상합니다.” 하율이 불안하게 말했다. “기분 탓인가요? 갑자기…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요.”
“나도… 좀 오싹한데.” 아린이 덩달아 몸을 웅크렸다. “아니, 오싹하다기보단… 뭔가 묘하게… 흥분되는 느낌?”
지혁은 이마를 짚었다. “전부 착각입니다. 심리적 요인일 뿐이에요. 미지의 존재를 봤으니 당연히…”
그 순간, 지혁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눈이 스크린에 고정됐다.
검은 구체에서 방출되던 빛이, 갑자기 선명한 분홍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새벽별호의 브릿지 내부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어… 어라? 이게 무슨…?”
하율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피부 위로 분홍색 빛이 어른거렸다. 그러자 뱃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간질거림이 올라왔다. 뺨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윤 수석님…” 하율이 저도 모르게 지혁을 불렀다.
지혁 역시 분홍빛에 물든 자신의 손을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율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마주치자, 하율의 심장은 더욱 미친 듯이 날뛰었다.
“강… 강 대원.” 지혁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평소의 냉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분홍빛은 점점 더 짙어졌다. 브릿지 안은 마치 거대한 솜사탕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왠지… 왠지 말이죠.” 하율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수석님이… 평소보다 잘생겨 보인달까…?”
그 말을 들은 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뭐, 뭐라고요?!”
이때, 아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캡틴… 제 사랑은 언제나 당신뿐이었다는 걸… 왜 모르시는 거죠…?”
선우 선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아린. 지금은 그런 농담할 때가 아니야…”
선우의 말에 아린은 눈물을 글썽이며 선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농담이 아니에요! 캡틴! 저는 진심이라고요!”
갑작스러운 고백 폭탄에 선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브릿지 안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의 중심에서, 검은 구체는 여전히 고요히, 그러나 맹렬하게 분홍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