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회색도시의 잔해
강철 비가 내렸다. 잿빛 하늘은 쉼 없이 지독한 산성비를 토해냈고, 폐허가 된 도시의 골목을 붉게 녹슬게 만들었다. 카이는 낡은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녹슨 구조물 사이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젖은 콘크리트 바닥은 미끄러웠고, 곳곳에 고인 오염수는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의 광학 임플란트가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스캔하며 위험 요소를 감지했다.
“젠장, 빌어먹을.”
작게 읊조린 욕설은 빗소리에 묻혔다. 사흘째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영양 페이스트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정제수 필터의 수명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주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살육이 난무하는 도시 하층민 구역에서 이런 상태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카이의 시야에 낡은 ‘물류 허브’ 표지판이 깜빡거렸다. ‘구역 7’ 외곽, 기업 전쟁 때 폭격 맞아 반쯤 무너진 건물이었다. 위험한 곳이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폐쇄된 물류창고는 언제나 귀한 에너지 셀이나 부품을 숨겨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최소한 작동하는 수준의 전력 공급 장치라도 찾아야 했다. 셸터의 환기 시스템이 맛이 가면, 눅눅한 공기와 독성 먼지 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하아….”
깊은 숨을 들이쉬자, 필터를 거친 공기였지만 여전히 퀴퀴한 쇠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젖은 전투복이 몸에 달라붙어 불쾌했지만, 차가운 금속성 한기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카이는 허리춤의 만능 공구를 꽉 쥐었다. 이 작은 도구가 그의 생명을 지탱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건물 내부로 진입하자,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첨벙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창문은 모두 깨져나갔고,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은 스산한 유령의 비명 같았다. 그의 임플란트가 희미한 열원을 감지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셋. 혹은 넷.
‘다른 녀석들인가.’
카이는 곧바로 몸을 숨겼다. 이곳에 자신 말고 다른 생존자들이 들어와 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원 고갈은 끝없이 경쟁을 부추겼고, 때로는 그 경쟁이 피로 얼룩지기도 했다.
낡은 컨테이너 더미 뒤로 몸을 숨긴 채, 카이는 천천히 머리만 내밀었다. 창고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거라도 건져야 해. 애들이 굶고 있어.”
“시끄러워. 널브러진 고철 쪼가리밖에 없잖아.”
“저기, 저 안쪽 창고는 아직 안 열어봤어. 기업 보안 장치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목소리로 보아, 가족을 부양하는 듯한 늙은 남자와 잔뜩 날이 서 있는 젊은 남자였다. 아무래도 스캐빈저(scavenger) 무리인 듯했다. 카이는 그들이 다른 구역의 스캐빈저인지, 아니면 상층부에서 밀려난 기업 말단 직원인지 가늠하기 위해 잠시 대화를 엿들었다.
“젠장, 저 보안 장치, 예전에 ‘블랙 크로우’ 애들이 건드려봤다가 팔 날아갔잖아.” 젊은 남자가 툴툴거렸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위험? 애들이 배를 곯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이 어딨는데!”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도 알잖아,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 거라고.”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창고 안쪽의 거대한 강철 문이었다. 낡은 로고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주변의 검게 그을린 자국들은 과거의 참혹한 시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뚫으려다 실패한 흔적.
카이는 침을 삼켰다. 저 문 안쪽에 귀한 물건이 있을 거라는 늙은 남자의 직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아니,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대기업 물류 허브의 중요 보안 시설은 웬만해선 뚫리지 않는다. 그리고 보통 그런 곳엔 희귀 자원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때, 갑자기 삑, 하는 경고음과 함께 주황색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먼지투성이 바닥을 스캔하던 레이저 감지기가 작동한 것이다. 스캐빈저 무리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이런 젠장, 기업 치안대잖아!” 젊은 남자가 황급히 외쳤다. “어떻게 알았지?!”
천장에서 둔중한 금속음이 울리더니, 낡은 환기구 덮개가 툭 떨어져 내렸다. 이어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착지했다. 육중한 강철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기업 보안 드론이었다. 붉은 광학 센서가 섬뜩하게 빛을 뿜었다. 총구가 스캐빈저들을 향해 고정되었다.
“불법 침입자들이다. 즉시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라.” 기계음이 창고를 울렸다.
카이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드론은 한 대. 하지만 스캐빈저들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드론의 화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드론이 한 대라는 건, 아마 주변에 더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카이는 조용히 은신처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재빨리 드론의 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드론이 스캐빈저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사이, 카이는 허리춤에서 미리 준비해둔 EMP 수류탄을 꺼내 던졌다.
“거기 누구냐!” 드론의 센서가 뒤늦게 카이를 향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앙!*
작지만 강력한 전자기파가 드론을 강타했다. 드론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고, 붉은 센서가 혼란스럽게 깜빡였다.
“튀어!” 카이는 스캐빈저들에게 소리쳤다. “저 문으로!”
스캐빈저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드론의 센서가 다시 움직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강철 문을 향해 달렸다. 늙은 남자가 먼저 문으로 향했고, 젊은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카이는 드론이 완전히 복구되기 전에 재빨리 접근했다. 그의 시각 임플란트가 드론의 취약점을 빠르게 분석했다. 전면부의 전력 코어를 보호하는 장갑이 EMP에 의해 일시적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제발…!”
카이는 만능 공구의 끝을 날카로운 갈고리 형태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드론의 전면부 장갑 틈새로 갈고리를 찔러 넣었다. 전기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그의 크롬 팔에 따끔거리는 감각을 전했다. 드론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그를 뿌리치려 했다.
“크윽…!”
카이는 온몸의 힘을 실어 갈고리를 비틀었다. ‘끼이이익!’ 금속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전력 코어가 노출되자, 드론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화됐다. 카이는 재빨리 코어를 움켜쥐고 뽑아냈다.
드론은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붉은 센서는 이제 완전히 꺼져버렸다.
“휴우….”
카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에는 뽑아낸 전력 코어의 잔열이 느껴졌다. 아직 쓸만한 상태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의 시선은 강철 문을 향했다. 스캐빈저들은 이미 문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고맙다! 이 은혜는…!”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카이는 무표정하게 강철 문을 바라봤다. 약화된 드론이든 뭐든, 녀석들의 도주를 도운 건 맞았다. 그들은 재빨리 기업 보안 장치를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이제 그 안의 모든 것을 싹쓸이하고 있을 터였다.
‘젠장, 선량하게 굴어봤자 손해만 보지.’
카이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드론은 스캐빈저들을 죽이거나 심한 부상을 입혔을 것이다. 그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도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그 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카이는 쓰러진 드론에서 쓸만한 부품을 몇 개 더 챙겼다. EMP 수류탄은 일회용이었으니, 이런 상황에 대비해 예비 부품을 늘 확보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강철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금속 문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보물이 될 수도,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이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잿빛 도시의 심장부까지라도 파고들어야 했다. 어쩌면 그 안에서, 이 지독한 생존 게임을 끝낼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