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세상이 무너진 지 어언 오십 년. 서울의 폐허는 이제 무성한 녹음과 싸늘한 잿빛 금속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삐죽하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의 뼈대들 사이로, 한때는 위대한 문명의 상징이었던 ‘서울 타워’가 거대한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 타워의 그림자 아래, 인류 최후의 희망이자 절망이 될지도 모르는 ‘무림천하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투기장 가장자리에 서서 련은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먼지와 매연이 걷힌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맑고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 깨끗함 속에는 대재앙 이후로 만연해진 알 수 없는 병균과 굶주림,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를 폭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낡은 도포자락이 차가운 바람에 펄럭였다. 품속에선 싸늘한 철제 명찰이 미약하게 무게감을 더하고 있었다.

천공 투기장은 과거의 거대한 경기장을 개조한 것이었다. 부서진 콘크리트 바닥은 수많은 발걸음에 다져져 단단해졌고, 반쯤 허물어진 관중석은 녹슨 철골과 뒤섞여 기괴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대재앙 이후 줄어든 인구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북적거렸다. 저마다 다른 문파의 상징을 몸에 두른 고수들, 각 지방에서 희망을 찾아 몰려든 피난민들, 그리고 이 대회의 결과에 모든 것을 걸고 도박하는 암상인들까지. 모두의 눈빛에는 기대와 불안, 그리고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련은 그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과 같은 종류의 그림자를 보았다.

이윽고 거대한 청동 징이 울렸다. 묵직하고 비장한 소리가 투기장 전체를 진동시켰다. 투기장 중앙에 마련된 연단 위로 백발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황폐 무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번 대회를 주최한 ‘십대 문파 연합’의 수장, 독고천이었다. 그의 눈빛은 늙었으나 아직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무너진 세상의 전사들이여! 그리고 살아남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들이여! 기억하라!” 독고천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증폭 장치를 통해 투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십 년 전, 대재앙은 우리의 문명을 삼키고, 대지를 오염시켰으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우리는 살아남았지만, 고통 속에서 허덕였다! 자원을 두고 싸웠고, 살기 위해 서로를 죽였다!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그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워지자, 투기장 전체가 숙연해졌다. 련은 품속의 명찰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백산문. 이제는 폐허가 된 그의 고향과, 그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이 무림천하대회는 단순한 승패를 가리는 대회가 아니다! 이 자리에서 승리하는 자는, 폐허가 된 이 땅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울 권한을 얻게 될 것이다! 오염된 대지를 정화하고, 혼란에 빠진 백성을 이끌어, 인류의 새로운 천년을 설계할 ‘천하재건령’의 주인이 될 것이다!”

천하재건령. 련은 피식 웃었다. 그럴싸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겠다는 욕망의 표출일 뿐. 오염된 대지를 정화할 방법? 혼란에 빠진 백성을 이끌 권한? 모두 허울 좋은 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그의 가족을, 그의 고향 마을을 짓밟았던 그들, ‘십대 문파 연합’에 복수하는 것.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진 명찰, ‘백산문의 후계자’라는 싸늘한 각인이 새겨진 명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독고천의 연설이 끝나자, 투기장은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곧바로 대진표가 발표되었다. 첫 번째 대결은 의외의 인물들 사이에서 성사되었다. ‘북천 일검’이라 불리는 노회한 검객과, ‘광야의 들개’라는 별명을 가진 떠돌이 무인. 둘은 아무 말 없이 투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북천 일검은 낡은 검집에서 녹슨 듯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 검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투기장을 가득 채울 만큼 날카로웠다. 광야의 들개는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몸에서는 짐승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심판의 호각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북천 일검의 검이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쉰 살도 더 넘어 보이는 늙은 검객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광야의 들개는 짐승처럼 몸을 숙여 피했지만, 그의 뺨에는 이미 붉은 선혈이 그어져 있었다.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련의 코끝을 스쳤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제 막 시작된 싸움의 열기가 그의 심장에도 파고들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련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의 차례는 아직 멀었지만, 이미 그의 몸 안에서는 억눌렸던 살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는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목표는, 바로 이곳, 무림천하대회의 끝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