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수록 숲은 거대한 입을 벌린 괴물처럼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 멀리, 인간의 마지막 보루라 불리는 성벽의 희미한 불빛조차 닿지 않는 이 곳은 ‘어둠의 장막’이라 불리는 국경 지대였다. 강은 젖은 나뭇가지에 걸린 낡은 망토를 더욱 움켜쥐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수색은 지쳤고, 그의 발걸음은 축축한 낙엽 위에서 위태롭게 미끄러졌다.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가.”
중얼거림은 이내 침묵에 잠식되었다. 그는 이 숲에서 보름달 아래 서성이는 그림자들을 보았다는 소문을 수없이 들었다. 인간의 피를 탐하고, 영혼을 갉아먹는다는 ‘밤의 종족’. 그들은 저 너머, 인간의 영역과는 완전히 분리된 깊은 숲의 심연에 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발아래 마른 나뭇가지가 ‘툭’ 부러지는 소리. 강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섬뜩한 한기가 그의 척추를 타고 올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정적이 답했다. 싸늘한 바람만이 나뭇잎을 스쳐 지나갈 뿐. 강은 이를 악물었다. 환영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위협이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어둠 속으로 나아가던 그의 눈에,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점이 포착되었다. 짐승의 눈빛과는 다른, 너무나도 깊고 차가운 빛.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존재는 밤의 정수로 빚어진 듯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등허리를 덮었고, 창백한 피부는 달빛 아래서 푸른빛을 띠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그 자체였지만, 그 안에 박힌 두 개의 별처럼 빛나는 은색 동공은 강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의 옷은 넝쿨과 어둠의 실타래로 엮인 듯 기이했지만, 그 속에서 드러난 가녀린 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강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토록 완벽한 아름다움은 그가 아는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의 심장은 비명 질렀다. 저것이 바로 ‘밤의 종족’, 인간의 영혼을 홀리는 악마들의 수장이라 불리는 존재 중 하나일 터였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밤이 흐르는 듯한 낮은 목소리.
“인간… 여기까지 온 것은 자살 행위.”
그녀의 시선은 강이 든 검으로 향했다. 마치 장난감을 보는 듯한 무심한 눈빛이었다. 강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네… 네 정체는 뭐냐. 감히 인간의 영역을…!”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마치 찰나의 바람처럼 움직였다. 강은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의 목에 닿았을 때, 세상의 모든 온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숨통이 조여 오는 고통과 함께,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감각.
“내가 누구냐고? 너희가 ‘밤의 저주’라 부르는 것의 일부지. 나의 이름은… 이리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서리가 피어났다. 강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의 근육은 이미 얼어붙어 말을 듣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강은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 깊고 차가운 눈동자 속에, 한 줄기 슬픔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착각이었을까?
바로 그 순간, 숲속 깊은 곳에서 사냥개들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수색대의 소리였다. 이리스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강을 놓아주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오자 강은 기침을 터뜨렸다.
“운이 좋군. 다음에는… 이리 쉽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이리스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목에는 차가운 서리가 마치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감히, 밤의 저주라 불리는 이리스의 눈동자에서 슬픔을 본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
그날 이후, 강은 달라졌다. 이전에는 밤의 종족이라면 무조건적인 증오와 두려움뿐이었던 그의 마음에 미묘한 균열이 생겨났다. 이리스의 슬픈 눈동자,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살려 보낸 이유. 그것들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매일 밤, 금지된 숲의 경계선을 맴돌았다. 마치 홀린 듯이.
몇 주 후, 다시 이리스를 만난 것은 낡은 고대 유적의 폐허 속에서였다. 강은 순찰 중 길을 잃었다고 둘러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리스는 돌무더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얼굴은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이젠 그녀의 존재 자체가 강에게 두려움보다는 묘한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또 왔나, 인간.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
그녀의 목소리는 비난조였지만, 이전과 같은 살기는 없었다. 강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이리스. 나는 당신이 왜 나를 살려 보냈는지 알고 싶다.”
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폐허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희 인간들은 호기심이 너무 많아. 그것이 너희를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장 위험하게도 만들지.”
“당신은… 슬퍼 보였다. 그때, 나를 죽이려 할 때.” 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뱉었다.
그녀의 시선이 강에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깊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슬픔? 너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저주받았으니. 너희는 우리를 악마라 부르지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뿐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너희는 우리를 사냥하고, 우리의 피를 탐해. 하지만 우리는 그저 이 밤 속에서 살아갈 뿐.”
강은 그녀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종족의 벽, 저주의 벽.
“당신은… 외로워 보인다.” 강은 감히 말했다.
이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 순간, 강은 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가면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를. 오랫동안 홀로 밤을 견뎌온 존재의 외로움을.
그녀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인간… 너는 너무 많은 것을 보려 하는군. 너는 위험하다. 나도, 너에게도.”
하지만 강은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이 금지된 이끌림은 이미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밤마다 이리스를 찾아왔다. 때로는 말을 나누고, 때로는 그저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리스는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점차 강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종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이 왜 밤에만 존재할 수 있는지, 왜 인간의 온기를 견딜 수 없는지.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지.
“우리의 피는 차갑다. 인간의 온기를 탐하면… 너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너의 생명이 나의 그림자에 흡수될 테니.” 그녀가 어느 날 밤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원한다.” 강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이 금지된 감정이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이리스.”
이리스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흘렀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물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반짝였다. 그녀는 강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강에게 닿기 직전 멈칫했다.
“안 돼… 강. 너는… 살아야 해. 이 저주받은 삶에 너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당신이 나의 삶이고, 나의 죽음이다.” 강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의 피부는 얼어붙는 듯 차가워졌고,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리스의 얼굴에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어리석은 인간…! 너는 죽을 거야!”
“당신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밤의 저주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불꽃이었다. 그들의 입술이 처음으로 닿았을 때, 강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피는 얼어붙고, 심장은 고통스럽게 요동쳤지만, 그의 영혼은 이리스의 차가운 밤에 영원히 묶이는 것을 환영했다.
***
그들의 금지된 사랑은 오래도록 비밀로 남을 수 없었다.
어느 밤, 강이 이리스와 함께 폐허에서 달빛 아래 서 있는 모습을 인간 수색대가 발견했다. 병사들의 비명이 숲을 갈랐다.
“악마다! 밤의 마녀가 인간을 홀렸다!”
화살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리스는 강을 자신의 뒤로 밀쳐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고, 어둠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도망쳐, 강! 내가 길을 열겠다!”
강은 이리스를 버리고 도망칠 수 없었다. “아니, 나는 당신과 함께 싸울 것이다!”
그는 검을 뽑아 들었지만, 수많은 병사들과 ‘밤의 종족’의 능력을 가진 이리스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리스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생명은 시들고,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숫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병사들의 투창이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이리스는 고통에 신음했지만, 강을 지키기 위해 더욱 격렬하게 싸웠다.
그때, 저 멀리서 이리스의 종족, 즉 ‘밤의 그림자’ 전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인간과 이리스를 동시에 노려보았다. 인간 병사들과 밤의 그림자 전사들 사이에 삼파전이 벌어졌다. 이리스는 양쪽 모두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강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강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았다. 그는 이리스의 손을 잡고 외쳤다. “이리스! 우리 도망치자! 어디든 좋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녀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안 돼… 강. 너는… 살아야 해. 너는 나의 마지막 희망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 거대한 어둠의 장막을 형성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전장을 뒤덮어 인간 병사들과 밤의 그림자 전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가라, 강! 내가 시간을 벌겠다!”
이리스는 강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강은 그녀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안 돼! 이리스!”
그의 외침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을 덮친 어둠의 장막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녀의 마지막 눈빛은 사랑과 슬픔, 그리고 영원한 이별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강이 정신을 차렸을 때, 폐허는 이미 피와 싸늘한 적막으로 가득했다. 이리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흔적은 밤의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렸다.
강은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그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는 금지된 사랑의 대가를 치렀다. 이리스는 자신을 희생하여 강을 살린 것이다.
밤은 여전히 깊었고, 숲은 여전히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은 더 이상 밤의 종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증오받고 저주받아야 할 악마의 피가 흐르지만, 동시에 이리스처럼 깊은 사랑과 희생을 아는 존재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강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목에 새겨진 차가운 서리 문신은 이리스와의 금지된 사랑의 증표처럼 영원히 남을 터였다. 그는 이제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밤의 종족의 세계로 갈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리스가 남긴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 이 저주받은 밤의 끝에서,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어둠 속 희망을 품고서. 그는 미지의 숲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의 삶은 이리스를 찾아 헤매는, 끝나지 않는 여정이 될 터였다. 밤의 저주가 덮인 세상에서, 그는 홀로 금지된 사랑의 노래를 읊조리며 걸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