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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검은 흙과 붉은 피**
땅은 갈라져 있었다. 오랜 가뭄이 휩쓸고 간 흔적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흙먼지가 콜록이는 기침처럼 폐부를 찔렀고, 메마른 목구멍은 갈증으로 타들어 갔다. 아린은 텃밭의 마른 줄기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곳. 희망조차 뿌리내릴 수 없는 곳.
“누나, 나 목말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어린 목소리에 아린은 허리춤에 찬 낡은 물통을 만졌다. 바닥에 겨우 한 모금 남은 물. 병든 동생, 재의 것이었다. 아린은 차마 뒤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절망을, 이 무기력을 재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쨍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마을 어귀에서 흙먼지가 거세게 일었다. 곧이어 땅을 울리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메마른 대지를 뒤흔들었다. 제국군이었다. 흑요 제국의 군단병들. 그들의 검은 갑옷은 태양 아래서도 빛을 흡수하는 듯, 마을 전체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아린의 심장이 발작하듯 뛰기 시작했다. 재를 뒤로 숨기며 밭둑에 납작 엎드렸다. 제국군은 마치 굶주린 늑대 떼처럼 마을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깃발에는 검은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고, 그 독수리의 발톱은 이미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쥐고 있었다.
“세금! 세금을 내놓아라!”
선봉에 선 중대장이 투박한 몽둥이로 아무 집 문짝을 후려쳤다. 쿵, 쿵, 쿵. 문이 부서지는 소리, 아이들의 비명 소리, 여인들의 흐느낌이 섞여 마을 전체를 공포로 물들였다.
“작년에 거둬간 것도 모자라, 올해는 뭘 더 가져가겠다는 거요!”
오랜 세월을 버텨온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엘 영감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현명하다는 평을 듣는 이였다. 아린은 카엘 영감의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이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을 봤다.
“주제넘게 짖어대는구나, 늙은 개가.”
중대장의 발길질이 카엘 영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영감은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등 뒤로 축 늘어진 밀짚 삿갓이 땅에 처박혔다.
“이곳은 제국군의 것이다! 너희 천한 것들이 감히 입을 놀릴 곳이 아니지! 세금을 내놔라! 식량, 보석, 아니면… 너희 자식이라도!”
악마의 포효 같았다. 군단병들은 집집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약탈했다. 부서진 항아리 파편들이 뒹굴었고, 찢겨진 옷가지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손은 곡물 창고를 털고, 가축을 끌어내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의 품에서 작은 장난감마저 빼앗아갔다.
“안 돼! 그건 우리 재가 먹을…!”
누군가 외쳤다. 아린은 고개를 돌렸다. 옆집에 사는 젊은 어머니였다. 군단병 하나가 그녀의 낡은 가방을 찢어버리고 그 안에 든 말린 약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약초는 병든 자식들을 위한 최후의 희망이었다.
“이런 쓰레기가 세금이라니! 감히 제국을 모욕하는 것이냐!”
병사는 약초를 발로 짓밟고는 어미를 밀쳐냈다. 쓰러진 여인의 눈에는 피눈물이 맺혔다. 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끓어오르는 분노와 무력감만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날 저녁, 마을은 초상집처럼 조용했다. 약탈당한 집들은 텅 비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린은 재를 품에 안고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재는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었다. 몸은 점점 더 마르고,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누나… 배고파….”
재의 속삭임에 아린은 그저 눈을 감았다. 줄 것이 없었다. 제국군이 모든 것을 가져갔다. 남은 것은 먼지와 좌절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몇몇 그림자들이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아린은 재를 눕히고 조심스럽게 그들을 따라갔다. 회관 안에는 카엘 영감을 비롯한 몇몇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카엘 영감의 옆구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영감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맹세보다도 단호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재산을 빼앗기고, 자식들은 병들고, 삶의 의미마저 송두리째 뽑혔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영감님, 저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들은 철과 마법으로 무장한 군대입니다. 저희는… 맨손뿐인데.”
누군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곧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군단병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들은 한낱 개미처럼 느껴졌다.
“맨손이라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카엘 영감은 힘없이 쓰러진 아린 옆의 목재 기둥을 바라봤다. “우리가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라면, 오히려 그들의 칼날이 두려울 게 무엇인가?”
“그렇다고 죽으러 갈 순 없어요.” 젊은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겐 아직 가족이 있습니다.”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린은 무심코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린은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움찔했지만, 이내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들을 마주봤다. “가만히 있으면, 가족들은 계속 고통받을 거예요! 재는… 재는 죽어가고 있어요. 이렇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바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나아요!”
그녀의 말에 회관 안에는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몇몇은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그녀의 말에서 한 줄기 불씨를 본 듯했다.
카엘 영감은 아린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아린의 말이 옳다. 우리는 더 이상 숨을 곳도, 잃을 것도 없다. 이곳은 이미 흑요 제국의 검은 발굽 아래 완전히 짓밟혔어. 하지만… 이 대륙에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감의 말에 모두의 귀가 쫑긋 섰다.
“수년 전, 제국의 폭정에 맞서 비밀리에 움직이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산 속에 숨어 무기를 만들고, 불온한 소문을 퍼뜨렸지. 비록 제국의 잔인한 토벌로 대부분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그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야.”
카엘 영감은 허리춤에서 낡은 가죽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지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선들과 희미한 글씨들로 가득했다.
“숲의 경계 너머, 오래된 협곡에 그들의 마지막 은신처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제국의 눈을 피해 무기와 식량을 모으고,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까지 어떻게 가죠?” 한 여인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는 길에는 제국군 초소가 즐비하고, 산적 떼도 많을 텐데요.”
아린은 지도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그려진 산맥과 강줄기.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하지만 재를 위한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내가 가겠어.”
아린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가서 그들을 찾아올게. 재를 살리고… 우리가 다시 일어설 방법을 찾아올 거야.”
카엘 영감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 쉬운 길은 아닐 게다, 아린. 하지만 네 안의 불꽃이 이 어둠을 태울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마을 전체에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겠지.”
아린은 재가 누워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주먹을 다시 꽉 쥐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 절망의 끝에서, 그들은 비로소 싸움을 시작하려 했다. 검은 흙 위로 피어날 붉은 피의 반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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