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지현은 익숙하게 타블렛 펜을 쥔 손으로 액정 위를 미끄러트렸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창밖으로는 도시의 희미한 불빛만이 얇은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마감일은 목덜미를 짓누르는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녔고, 집중의 시간은 언제나 고요함 속에서 찾아왔다. 오늘 그녀가 그려야 할 그림은 한 아이가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표정은 평온하고, 눈빛은 순수해야 했다.
지현은 작업 중 잠시 멈춰 서서 어깨를 쭉 폈다.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는 것이 꼭 밤샘 작업의 훈장 같았다. 컵에 남은 차가운 보리차를 마시고, 다시 펜을 들었다. 그때였다.
딸깍.
작은 소리였다. 마치 먼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하지만 분명히 들렸다. 지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도 닫혀있고, 선풍기도 꺼져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그림 속 아이의 눈에 따뜻한 온기가 깃들었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될 터였다. 지현은 한숨 돌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책상 한쪽에 놓여있던 연필꽂이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똑바로 서 있던 연필꽂이 속 연필 하나가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어라?”
누군가 건드린 것도 아닌데, 마치 혼자서 넘어질 준비라도 하는 듯 위태롭게. 지현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연필을 다시 세웠다. 어쩌면 조금 전 의자를 움직일 때 생긴 진동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별일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평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지현은 늦잠을 잤다. 겨우 몸을 일으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토스트라도 구워 먹을 심산이었다. 식빵을 꺼내 토스터에 넣고, 우유팩을 집어 들었다. 컵을 꺼내기 위해 상부장을 열었다.
쨍그랑!
컵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현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손에 들고 있던 우유팩을 떨어뜨릴 뻔했다. 깨진 컵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게 뭐야?”
지현은 눈을 비볐다. 분명히 컵은 선반 안쪽 깊숙이, 가장자리에 걸리지 않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떨어질 수 있지? 지현은 조심스럽게 깨진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손에 쓸린 유리 파편이 따끔했다.
그날 오후부터는 더욱 기묘한 일들이 벌어졌다. 베란다 창문이 혼자 살짝 열려 있거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거실 탁자 위에 놓아둔 리모컨이 소파 밑으로 떨어져 있거나. 급기야 저녁에는 분명히 잠그고 나갔던 현관문이 그녀가 돌아왔을 때 살짝 열려 있었다. 다행히 잠금장치 자체는 걸려 있어서 문이 활짝 열린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 틈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현은 이제 더 이상 ‘착각’이나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아파트에 혼자 사는 그녀는 점점 섬뜩함을 느꼈다. 누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 도둑맞은 것도 없다. 그저 물건들이 제자리를 벗어나거나, 문이 저절로 열릴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지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설마… 귀신 같은 건 아니겠지?’ 머릿속에서 비과학적인 단어들이 맴돌았다. 그러나 이 현상들을 설명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침묵 속에서, 지현은 문득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였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미닫이문은 요즘 들어 뻑뻑해져서 소리가 좀 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문득 닫혀 있던 문이 혼자 열리는 소리였다.
지현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눈을 감고 모른 척할까? 아니면 용기를 내어 확인해 볼까? 그녀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결국,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휴대폰의 손전등 기능을 켜고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휴대폰 불빛이 흔들리며 벽과 가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그 그림자 사이로, 부엌 미닫이문이 정말로 절반쯤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 없어요?”
지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저 고요함만이 그녀의 질문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숨죽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때, 휴대폰 불빛이 비추던 거실 탁자 위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탁자 한가운데 놓여 있던 작은 화분이었다. 그녀가 애지중지 키우던, 작고 푸른 다육식물이 심겨 있는 화분. 그 화분이 아주 천천히, 탁자 한쪽 끝으로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마치 누가 손가락으로 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현은 숨을 멈췄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화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탁자의 가장자리에 도달하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위태롭게 매달렸다. 그리고 이내 바닥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순간, 지현은 문득 직감했다. 이것은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 말을 걸려는 듯한 느낌? 조용하고 고요한 소통.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떨어뜨려 엄마의 주의를 끄는 것처럼.
지현은 홀린 듯 탁자로 다가갔다. 화분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그녀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화분을 붙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화분이 손에 닿는 순간, 그녀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괜찮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화분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화분 옆에 놓여 있던 작은 그림 액자가 흔들렸다. 딱, 한 번.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이.
지현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는… 혼란스러웠고,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평온함마저 느껴졌다. 이 아파트에 그녀 말고 다른 존재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조용하고 고요한 손님.
“안녕?”
지현은 다시 한번, 이번에는 훨씬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자, 부엌 미닫이문이 다시 한번, 아주 천천히, 스르륵 닫혔다.
그리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아주 이상하고, 아주 조용한, 두 존재만의 고요함이.
지현은 화분을 보았다. 그리고 작게 미소 지었다.
이 집의 밤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