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폐허의 그림자
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모래 먼지를 휘몰아치며 텅 빈 도시를 할퀴었다. 부서진 아스팔트 위를 걷는 이현의 낡은 군화는 깎여나간 건물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갔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탁하고 잿빛이었으며, 햇살은 힘없이 도시의 폐허 위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이현의 등 뒤에는 낡고 해진 배낭이 그의 모든 소지품을 담은 채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한 손에는 녹슨 철근을 날카롭게 다듬어 만든 임시방편의 창이 들려 있었다.
“젠장, 또 헛걸음인가.”
마른 입술을 씹으며 이현은 중얼거렸다. 벌써 며칠째 식량도, 마실 물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의 눈은 피로와 좌절로 젖어 있었지만, 그 안에 꺼지지 않는 희미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오직 그 하나의 목표만이 그를 이 회색빛 지옥 속에서 계속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너진 상가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렸다. 한때 화려했을 불빛들은 사라진 지 오래, 이제는 그저 흉터처럼 남은 철골 구조물만이 과거의 영광을 초라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어둠침침한 상가 내부를 훑었다. 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곳일수록 더 위험하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침묵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신발 밑창에 밟히는 유리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폐허가 된 가게 안은 온통 뒤집혀 있었다. 찢어진 옷가지, 깨진 플라스틱 용기,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금속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한때 사람들이 북적이며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했을 공간은 이제 죽음의 정적만이 감도는 무덤과 같았다.
이현의 뇌리에는 불현듯 과거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따뜻한 햇살 아래 깔끔한 아파트 단지를 거닐던 오후. 손에 들려 있던 뜨거운 커피와 한적한 주말의 여유.*
이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떤 재앙이 닥쳐서,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그는 멸망해버린 수백 년 후의 미래에 던져졌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뼛속까지 시려오는 허기와 마르지 않는 갈증, 그리고 매일 밤 그의 목을 죄어오는 공포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잔인한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짧은 회상에서 벗어나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이곳은 과거의 달콤한 추억에 잠겨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철근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허를 뒤지던 그의 눈에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박스 더미가 들어왔다.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나마 다른 곳보다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작은 희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제발, 뭔가 쓸 만한 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박스 더미를 헤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박스에는 찢어진 옷가지들이 들어있었다. 두 번째 박스에는 곰팡이가 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박스.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나무 박스였다. 다른 것들과는 달리 꽤 견고해 보였다.
그가 박스에 손을 뻗는 순간, 정적을 찢고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동시에 낡은 천장이 흔들리며 먼지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비명 소리는 상가 안쪽, 건물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젠장, 설마…”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 도시에는 ‘그것들’이 살았다. 파괴된 세상에서 진화한, 아니, 퇴화한 끔찍한 생명체들.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린 채 오직 탐욕스러운 본능만이 남아있는 존재들. 그들은 주로 밤에 활동했지만,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라면 대낮에도 그림자처럼 나타나곤 했다.
발소리가 들렸다. *쿠구궁, 쿠구궁.* 규칙적이지 않고 불쾌하게 뒤틀린 소리.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분명히 이곳으로 오고 있다. 이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숨을 멈추고 박스 뒤로 바싹 몸을 숨겼다. 철근 창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만, 그는 애써 공포를 밀어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겨왔다. 이번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기괴하게 삐져나온 팔다리를 가진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흉터와 상처가 가득한 채, 핏발 선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분명히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그것의 콧구멍은 연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고, 찢어진 입에서는 불쾌한 침이 뚝뚝 떨어졌다.
거대한 몸집이 상가의 내부로 완전히 들어서자, 이현이 숨어 있는 박스 더미 쪽으로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것의 시선이 마치 그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현은 숨을 죽이며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들키면 끝이다. 저 거대한 괴물에게 한번 걸리면 이 낡은 철근 창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휘익!*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파편이 이현이 숨어있는 박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박스에 박힌 파편은 깊은 홈을 남겼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신음할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그것의 공격이었다. 냄새를 맡은 건가? 아니면 그저 우연히 던진 것인가?
괴물은 미동도 없이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현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미 들킨 것이다. 더 이상 숨을 곳은 없었다.
“젠장!”
그는 박스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동시에 괴물은 끔찍한 울음소리를 내며 이현에게 달려들었다. 이현은 철근 창을 휘둘렀지만, 괴물은 노련하게 몸을 피하며 그의 팔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어버렸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
“크아악!”
이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팔뚝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괴물은 다시 한번 그에게 돌진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이현은 재빨리 몸을 굴려 옆으로 피했지만, 괴물의 발톱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찢어지는 천 소리!*
그는 간신히 벗어났지만,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그 순간, 그의 시야에 끈으로 묶여 있던 나무 박스가 들어왔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이현은 온 힘을 다해 창을 내던졌다.
*휘이익! 퍽!*
철근 창은 정확히 괴물의 목덜미에 박혔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느낄지언정, 치명타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분노한 듯 피로 물든 눈으로 이현을 노려보았다.
*쿠구궁!*
괴물이 거대한 몸으로 바닥을 박차고 다시 한번 솟구쳤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이현은 절망적인 눈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덮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곳에서, 이 미래에서, 그의 생존은 언제나 이토록 아슬아슬한 한 줄기 희망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콰아앙! 굉음과 함께 상점의 낡은 진열장이 산산조각이 났다. 과연 그는 이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