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로 쏟아지는 새벽빛은 늘 그랬듯 차갑고 희망 없었다. 강진은 낡은 창문 너머로 회색빛 하늘을 응시했다. ‘대붕괴’ 이후로 태양은 제 빛을 잃었고, 세상은 온통 먼지와 잿빛으로 물들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고장 난 회로 기판을 내려다봤다. 미세하게 부식된 구리선,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균열. 보통 사람이라면 폐기 처분했을 물건이지만, 그의 눈에는 재활용될 가치가 있는 조각으로 보였다. 그는 핀셋으로 부품 하나를 조심스레 분리했다.
“강진 씨! 계십니까!”
묵직한 금속 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가 그의 작은 공간을 흔들었다. 젠장, 올 것이 왔군. 강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 ‘성채’라고 불리는 생존자 집성촌에서 그를 찾는 일은 보통 좋지 않은 소식과 함께 찾아왔다. 썩어가는 문명 위에서 간신히 버티는 이들은 늘 문제에 시달렸고,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육중한 볼트를 풀었다. 문이 열리자, ‘보안대’ 소속의 젊은 대원 하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피로가 역력했다.
“정대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급히 오셔야 한다고… 박 이사님이… 큰일입니다!”
강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박 이사라면 이 성채의 실질적인 재정과 물자를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단순한 사건이 아닐 터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낡은 가죽 재킷을 걸쳐 입었다. 재킷 안주머니에는 닳아빠진 수첩과 연필이 들어 있었다.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도구였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었다. 강철 뼈대가 드러난 벽면에는 위급 상황을 알리는 비상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금속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는 성채의 심장부로 향했다. 재활용된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이곳은 미로 같았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박 이사의 일이 이미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성채의 가장 깊숙한 곳, 과거 고급 아파트였던 건물의 잔해에 자리 잡은 박 이사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이미 보안대원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대장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거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제야 오나! 빨리 오라고 했잖나!”
정대장은 굵은 땀방울을 연신 닦아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강진은 그의 어깨 너머로 사건 현장을 훑었다. 박 이사의 방은 성채 내에서도 가장 안전한 구역에 속했다. 두꺼운 강철 문과 창문은 쇠창살로 견고하게 막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강진이 차분하게 물었다.
“박 이사님이… 죽었습니다.” 정대장의 목소리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전해졌다. “오늘 새벽, 경비를 서던 대원이 박 이사 방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네. 달려와 보니 문이 잠겨 있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박 이사님이… 침대에 누운 채로….”
정대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의 주먹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강진이 물었다.
정대장은 한숨을 쉬며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 보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으니.”
강진은 방으로 들어섰다. 공기 중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피 비린내, 그리고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방은 꽤 넓었다. 중앙에는 낡은 철제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박 이사의 시신이 천장을 향한 채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셔츠 왼쪽 가슴팍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칼에 찔린 상처였다.
강진은 침대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시신에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저항의 흔적은 없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는 깨진 컵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컵은 차가운 물이 담겨 있었던 듯, 주변이 축축했다.
“문은 어떻게 잠겨 있었습니까?” 강진이 물었다.
정대장이 대답했다.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네. 부수고 들어갈 때까지 굳게 잠겨 있었지. 열쇠는… 박 이사님 주머니에서 나왔어.”
강진은 문의 상태를 살폈다. 육중한 강철 문은 억지로 부수고 들어간 흔적이 역력했다. 문 안쪽에는 두꺼운 강철 빗장이 내려져 있었다. 그 빗장은 오직 방 안에서만 걸 수 있는 구조였다. 창문은 낡은 쇠창살로 촘촘히 막혀 있었고, 창문 틀에도 부수거나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이 방은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다.
“외부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옆에 서 있던 보안대원이 보고했다.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강진은 아무 말 없이 방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벽에 걸린 낡은 지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류 뭉치, 바닥에 깔린 해진 카페트.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했지만, 그의 눈은 미세한 불협화음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벽 한쪽에 놓인 낡은 선반 위로 향했다. 선반 위에는 먼지 쌓인 책 몇 권과 함께 작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조각상이었다. 하지만 강진의 시선이 그 조각상 아래, 선반 모서리에 아주 미세하게 긁힌 자국에 멈췄다. 너무나 작아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자국.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듯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진의 눈에 섬광이 스쳤다. 그는 침대 옆의 깨진 컵 조각들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리고 선반의 긁힌 자국과 깨진 컵 조각을 번갈아 보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냉소적이었으나, 동시에 무언가를 간파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대장이 답답한 듯 물었다. “무슨 단서라도 찾았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 자살인가? 하지만 저 상처는 자살이라고 보기엔 너무… 명확하잖나.”
강진은 시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 이사의 시신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죽은 자에게 말을 걸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살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방은… 밀실도 아니었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운 긴장된 공기를 갈랐다. 정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강진은 깨진 컵 조각들 중 가장 큰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선반의 긁힌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자국은 무언가가 이 선반 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컵 조각들의 위치와 깨진 모양을 보면, 단순히 손에서 놓쳐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강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은 이미 이 불가해한 밀실 살인의 트릭을 꿰뚫고 있었다.
“박 이사님은 살해당한 겁니다. 이 완벽해 보이는 밀실 안에서, 범인의 손에 의해.”
정대장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강진을 바라봤다. 그와 다른 보안대원들의 눈에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강진의 눈빛에는 이미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 듯한 명확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부터 진짜가 시작될 겁니다.” 강진이 덧붙였다. “밀실은 없었습니다. 오직, 완벽하게 가장된 ‘밀실처럼 보이는 방’만 있었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