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소리가 잿빛 대지를 울렸다. 아득히 먼 지평선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마천루의 잔해가 검은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문명의 비명 같은 유산이었다. 바람은 썩은 철과 먼지, 그리고 희미한 죽음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이것이 종말 이후의 세상이었다.
한율은 낡은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몄다. 먼지는 그의 턱수염에 하얗게 내려앉았고, 차갑게 식은 공기는 폐부를 찔렀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인 검은 말, ‘묵혈(墨血)’은 묵묵히 폐허 속 길을 내달렸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은 끝없는 겨울 같았다. 아니, 겨울이라기보다는 모든 생명이 타버린 재와 같은 침묵만이 가득한 영원한 저녁에 가까웠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 목적지가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멀리,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잔해가 삐죽이 솟아 있었다. 한때는 환호와 열기로 가득했을 그곳은, 지금은 균열에서 뿜어져 나온 기이한 덩굴과 검붉은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켜낸, 그러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최후의 보루, ‘천명(天命)의 장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 왔다, 묵혈.”
한율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말은 콧김을 뿜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흘 밤낮을 달려온 여정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몇 안 되는 거주지를 지나올 때마다 보았던 절망적인 눈빛들이 그의 기억을 스쳤다. 그들은 희미한 희망을 품고 한율을 바라봤다. 이 대회가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대회의 이름은 ‘파멸의 장원, 천하쟁패전’.
인류가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과 부패한 기운에 맞서기를 수십 년. 흩어진 강자들이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했지만, 파멸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남은 다섯 개의 문파와 부족 연합은 이 멸망 직전의 땅에서 마지막 도박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천하쟁패전에서 승리하는 자가 ‘통수(統帥)’가 되어, 남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든 권한을 가진다. 그리고 그 통수가 이끌 마지막 전쟁에서 인류는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장원의 입구에 다다르자, 거대한 석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균열 이전의 문명에서 거대한 수송선이 드나들던 곳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앞에는 육중한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검에는 붉은 피의 흔적이 말라붙어 있었다.
한율이 묵혈의 고삐를 당기자, 전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깊은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누구냐. 장원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
“한율이다. 무림맹의 비무 인장(印章)을 받았다.”
한율은 품속에서 낡았지만 위엄 있는 청동 인장을 꺼내 보였다. 인장에는 한 마리의 용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전사는 인장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 시기에 여기에 왔다는 건, 자네도 그 ‘도박’에 참여하러 온 모양이군. 조용히 따르라.”
철문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서서히 열렸다. 안쪽은 바깥보다 더욱 암울한 분위기였다. 거대한 경기장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관중석은 무너져 내린 잔해로 가득했고, 비무장 중앙에만 간신히 싸울 만한 평지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의 기운이 뒤섞여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한율은 묵혈을 임시 마구간에 맡기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양하고도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한쪽에서는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든 거한이 바닥에 앉아 묵묵히 도끼날을 갈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피비린내와 함께 짐승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철웅(鐵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북방의 야만 부족 출신 전사였다. 균열에서 살아남은 괴물들의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다른 편에는 섬세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차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손가락 끝에는 희미하게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남궁세가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 ‘남궁 아리’였다. 그녀는 가문이 전승하던 검법의 모든 것을 익혔다고 했다.
벽 한쪽에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녹슨 듯한 오래된 목검이 매달려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어떤 강자보다도 깊고 가늠하기 어려웠다. 은퇴한 지 오래라 알려졌던 전설적인 무인, ‘검혼(劍魂)’ 노인. 그가 왜 이 파멸의 비무에 다시 나타났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한율은 조용히 경기장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도, 기괴한 무기를 들지도 않았다. 검은 도포 자락 아래로 드러나는 낡은 검집에는 오직 단 하나의 검만이 잠들어 있었다. 검집은 오래되어 닳아 있었고, 손잡이 부분은 그의 손때로 반질거렸다.
그때, 갑자기 경기장 중앙으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무림맹’의 수장인 ‘구진(九陣)’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강철 같았다. 그는 낡은 비석 위에 올라서서 모인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한율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쳤다.
“모두 모였군.”
구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모든 무인의 귀에 명확히 박혔다.
“이곳, 천명(天命)의 장원에 모인 자들이여. 너희는 알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세상은 부패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곧 역사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감도는 비통함이 경기장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 기회에 모든 것을 걸기로. 파멸의 장원, 천하쟁패전. 이 비무에서 승리하는 자가 통수가 되어, 살아남은 인류를 이끌 것이다. 그 통수는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 어떤 반론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의 명령은 곧 인류의 명운이다.”
구진의 눈빛이 무인들을 하나하나 꿰뚫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이 비무장에서 최후의 대결이 펼쳐진다. 승자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 것이고, 패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침묵만이 이어졌다. 무인들의 표정은 각자의 욕망과 결의, 그리고 숨길 수 없는 두려움으로 뒤섞여 있었다. 한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희망이라…’
그에게 희망은 멀리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비극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서.
그의 뇌리에 차가운 강물이 흐르는 작은 마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그가 지켜야 할 존재의 희미한 미소. 그는 그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파멸의 세상에서 그 어떤 적과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구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오직 하나. 승리만이 존재한다. 죽이든, 쓰러뜨리든, 항복을 받아내든. 마지막까지 이 비무장에 서 있는 자가 통수가 된다. 그리고… 이 싸움은, 내일부터 시작된다.”
내일부터. 모든 무인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실린 침묵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한율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차가운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멸망의 그림자 아래, 최후의 대결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