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가면무도회

숨 막히는 드레스 자락이 발목을 감쌌다. 거울 속 여자는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뜨거운 복수심이 숨 쉬고 있었다. 완벽했다. 이 모든 순간을 위해 그녀는 피와 땀, 그리고 무수한 눈물을 바쳤으니까. 2년 전, 세상의 끝에 서서 모든 것을 잃었던 서지아는 이제 없었다. 그녀는 오늘,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얼굴로, 지옥에서 올라온 여왕처럼 등장할 참이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서 이사님?”

수석 비서 강민이 그녀의 뒤에 서서 조용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지아는 그 속에 감춰진 묘한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이 날을 기다려왔을 테다.

“완벽하게.”

지아는 짧게 답하고는 거울 속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 가면을 쓴 자신에게. 그리고는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목적지는 오늘 밤, 이 도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추악한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

홀은 눈부신 샹들리에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값비싼 향수 냄새와 위선적인 웃음소리가 뒤섞여 불쾌한 화음처럼 울렸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연단 위의 두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혜진과 강태준. 그들이 훔쳐 간 내 삶의 왕관을 쓰고, 대중의 찬사를 즐기고 있었다.

혜진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태준의 옆에 서서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2년 전, 내 등을 칼로 찌르던 순간에도 똑같이 아름답게 빛났었지. 태준은 그런 혜진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 안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아이디어로, 내 노력으로 세워진 이 회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공로를 자랑하고 있었다. 역겨웠다.

지아는 차가운 샴페인 잔을 들고 홀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등장에 홀 안의 소음은 미세하게 잦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그녀에게로 향했다. 핏빛처럼 강렬한 버건디 드레스는 그녀의 흰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묘한 섬뜩함을 자아냈다. 깊게 파인 등골은 과감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서 나오는 아우라는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연단 위의 혜진의 미소가 순간 굳는 것을 지아는 놓치지 않았다. 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이혜진, 강태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너희는 날 알아보는구나. 지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될 테니.

그때였다. 샴페인 잔을 든 누군가 서지아의 어깨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잔에서 샴페인이 넘쳐 지아의 드레스에 붉은 점을 찍었다. 완벽했던 그녀의 옷에 얼룩이 생긴 순간, 지아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숙녀분. 제 눈이 그쪽 매력에 홀려 잠시 길을 잃었군요. 이런 불상사를 초래하다니, 제 잘못입니다.”

능글맞은 목소리였다. 부딪힌 남자는 말끔한 수트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유쾌해 보였지만, 지아의 날카로운 감각은 그의 눈빛 속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읽어냈다. 어딘가 익숙한, 그러나 동시에 낯선 이질감.

지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이런 시덥잖은 작업 멘트에 넘어갈 만큼 자신이 물렀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공간에선 모두가 어딘가에 홀려 길을 잃기 마련이죠. 맹목적인 탐욕에 홀리거나, 덧없는 명예에 홀리거나.”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묘한 비꼬는 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말에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말씀 재주가 보통이 아니시네요. 혹시 저처럼 길을 잃으신 분인가요? 이 복잡한 홀에서 방황하는 외로운 영혼 말입니다.”

그는 능청스럽게 지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도윤입니다. 길 잃은 영혼들을 이끄는 건 제 특기죠.”

윤도윤. 낯선 이름이었다. 지아는 그의 시선을 피해 연단 위를 다시 한 번 스캔했다. 혜진과 태준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감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복수심은 차가운 피를 다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서지아입니다. 길을 잃은 적은 없습니다만, 가끔은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윤도윤의 손을 무시하고, 강민 비서가 미리 준비해둔 새로운 샴페인 잔을 들었다. 핏빛 샴페인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자, 2년 전의 아픔이, 배신감이, 그리고 분노가 온몸의 세포를 다시 자극했다.

“서 이사님, 연단으로 올라가시죠.”

강민이 지아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미리 계획된 수순이었다. 오늘의 작은 칼날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되었다. 지아는 윤도윤에게 미소 한 조각 던지지 않고 등을 돌렸다.

“즐거운 방황 되시길.”

차가운 인사와 함께 지아는 연단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단호했고, 드레스 자락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유려하게 흔들렸다. 혜진과 태준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혜진은 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지아를 맞이했다.

“어… 서지아 이사님! 오셨군요. 이렇게 귀한 걸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아는 연단에 올라 혜진의 옆에 섰다. 그녀의 눈동자는 혜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혜진. 네가 나에게서 앗아간 모든 것을 돌려받을 시간이야. 그리고 그 대가는… 네가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잔혹할 거야.

“혜진 씨도 여전하네요. 여전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군요. 2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 밤 그 시선이 당신에게는 축하가 아닌 경고가 될 거라는 겁니다.”

지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혜진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혜진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고, 태준은 불쾌한 표정으로 지아를 노려봤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서 이사님.” 혜진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지아는 그 미소를 비웃듯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직 모르시겠어요? 괜찮아요. 곧 알게 될 테니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들의 가장 큰 업적이라 칭송받는 그 프로젝트에 균열이 가고 있을지도 모르죠. 시작은 아주 작은 균열로부터니까.”

그녀의 말에 혜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태준의 눈동자가 동요하는 것을 지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둔 작은 USB를 스윽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혜진의 손에 살포시 쥐여주었다.

“이건, 2년 전 당신이 나에게서 훔쳐 간 꿈에 대한 작은 선물이에요. 열어보면 아주 놀라운 ‘진실’이 담겨 있을 겁니다.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무모한 모래성을 쌓아 올렸는지 알게 될 거예요.”

지아는 혜진의 떨리는 손을 외면하고, 마이크 앞으로 걸어 나갔다. 홀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게 위선적이고, 완벽하게 잔혹한 미소였다.

“여러분, 오늘 밤은 정말 특별한 밤입니다. 빛나는 성공 뒤에 숨겨진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진실이 밝혀질 테니까요.”

그녀의 시선은 다시 윤도윤에게 향했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아는 문득, 그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미처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패를 읽어내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니, 모두들 오늘 밤을 즐기세요. 이 가면무도회가 끝나기 전까지, 누가 가면을 벗고 가장 처절하게 울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지아의 마지막 말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홀의 스크린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코드가 번개처럼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혜진과 태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에 대한 치명적인 보안 결함 보고서가, 실시간으로 모두의 눈앞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면무도회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아는, 이제 막 첫 번째 칼을 빼 들었을 뿐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혜진의 절규가 홀을 갈랐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아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진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차례였다. 그녀의 발밑에서, 혜진과 태준이 쌓아 올린 모래성이 처절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아의 눈에 다시 윤도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더 이상 능글맞거나 유쾌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동자 속에는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녀의 모든 가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지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이 복수극의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인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그녀의 완벽한 복수극에 던져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