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은 언제나 허울뿐인 평화로 빛났다. 반짝이는 네온사인 아래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들의 소박한 일상에 잠겨 있었다. 그 불빛들을 뚫고 솟아오른 고층 빌딩의 꼭대기,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곳에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림자는 서서히 형체를 갖추더니,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어둠을 찢었다.
“이제야… 돌아왔군.”
목소리는 쉬었지만,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지독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싼 것은 더 이상 찬란한 무지개빛 마법 소녀의 의상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엮어낸 갑옷은 날카로운 덩굴처럼 팔과 다리를 휘감았고, 등 뒤에서는 한때 빛의 날개였던 것이 검고 찢어진 천의 형상으로 너울거렸다. 손끝에서는 어둠의 기운이 꿈틀거리며,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지유는 고개를 들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빌딩을 응시했다. 저곳, 저 빌딩의 최상층에 ‘그녀’가 있었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영광의 탑에서, 그녀는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여왕처럼 군림하고 있을 터였다. 지유의 입술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세희.’*
그 이름은 혀끝에서 비린 맛을 남겼다. 눈을 감자,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그 날의 참상이 생생했다. 서로의 등을 맞대고 싸우던 전장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빛나는 마법 소녀였던 자신이 왜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는지.
*“지유야, 미안하지만 이건 네 몫이 아니야. 너무 빛나서… 눈이 부시거든.”*
환청처럼 울리던 세희의 속삭임. 그리고 등 뒤를 파고들던 잔혹한 칼날 같은 마력. 지유가 믿었던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생명을 앗아갔던 것은 적이 아니었다. 가장 소중하고 사랑했던 친구의 배신이었다. 절망 속에서 그녀는 세상의 틈새로 던져졌다. 시간과 공간마저 뒤틀린 어둠 속에서, 지유는 겨우 숨통만 붙인 채 살아남았다. 끝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그녀를 지탱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복수.*
그녀의 마력은 변했다. 빛은 어둠으로, 치유는 저주로, 수호는 파괴로 뒤틀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찾은 그녀의 힘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고 잔혹했다. 이제, 그 힘을 써야 할 때였다.
지유는 발밑의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림자처럼 유려한 움직임으로, 그녀는 도시의 밤하늘을 가로질러 세희가 머무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의 존재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세희의 마법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지유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렸던 것이다.
최상층의 유리 펜트하우스. 화려한 샹들리에가 번쩍이는 그곳에서 세희는 우아하게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모두의 영웅이자, 이 도시를 수호하는 빛의 마법 소녀였다. 완벽하게 연출된 그녀의 미소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아름다웠다.
“오늘도 임무 완수. 수고 많았어, 세희 님.”
측근으로 보이는 남자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이 정도는 제가 늘 하던 일인걸요.”
그때였다. 거대한 창문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그림자가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 파편이 빗발치듯 튀고, 샹들리에의 불빛이 흔들렸다. 세희와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누, 누구냐!” 남자가 검을 뽑아 들었지만, 그림자는 이미 그를 지나쳐 세희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세희.”
지유의 목소리가 울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천 조각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세희를 똑바로 응시했다. 세희의 와인잔이 손에서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지… 지유? 말도 안 돼! 너는, 너는 분명 사라졌을 텐데!” 세희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떨렸다.
지유는 느릿하게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 드러난 얼굴은 이전의 밝고 순수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창백한 피부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가 겪었던 지옥을 그대로 증명하는 듯했다.
“사라져? 네가 날 밀어 넣은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너를 저주하며 매일 밤 부활을 꿈꿨어.” 지유의 목소리는 한 음 한 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네가 앗아간 모든 것을 돌려받으러 왔어. 네가 차지한 나의 자리, 나의 명예, 그리고… 내 삶까지도.”
“헛소리 마! 너는 그저 나약했을 뿐이야! 모두가 널 잊고 나를 새로운 영웅으로 추앙했어! 넌 실패자일 뿐이야!” 세희는 허둥지둥 손을 뻗어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잡았다. 지팡이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몸을 감쌌다. “감히…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세희의 손에서 찬란한 빛의 구체가 형성되어 지유에게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한때 지유가 사용했던 정화의 마법과 똑같았다. 하지만 지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바닥을 기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솟아올라 빛의 구체를 집어삼켰다. 빛은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빛마저도, 내 것이었지.” 지유가 냉소를 흘렸다. “그 빛을 네 멋대로 사용하며, 내가 죽은 줄 알았겠지. 어리석은 것.”
지유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뱀처럼 기어 올라와 세희를 향해 돌진했다. 그림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덩굴로 변해 세희의 움직임을 봉쇄하려 했다. 세희는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방벽을 세웠지만, 그림자의 덩굴은 그 방벽을 뚫고 그녀의 팔목을 휘감았다.
“크아악! 이게 무슨… 힘이야?! 너는… 너는 이런 힘을 가진 적이 없었어!” 세희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네가 나에게 준 선물이지. 어둠 속에서 죽음을 헤매는 동안, 내 마력은 새롭게 각성했거든.” 지유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녀의 검은 마력이 펜트하우스의 공간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제, 네가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야, 세희.”
지유는 손을 들어 올렸다. 펜트하우스 내부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지며 암흑이 찾아왔다. 오직 지유의 붉은 눈만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림자 덩굴은 세희의 몸을 더욱 강하게 옥죄었고, 그녀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해. 네가 내게 선사했던 지옥을, 나는 네게 그대로 돌려줄 테니까.”
지유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피의 복수가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차갑고 잔혹한 서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