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그림자 속의 맹세

낡은 백화점의 유리 천장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고, 폐허가 된 도시의 잿빛 하늘이 그 구멍을 통해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썩은 살과 먼지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가 공기를 채웠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깨진 유리가 자갈처럼 밟혔다. 강진우는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의 등 뒤에는 빛바랜 배낭이 축 늘어져 있었고, 오른손에 쥔 낡은 자동소총은 언제든 격발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이라, 괜찮아?”

나직이 속삭이자,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칠흑 같은 공간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날렵한 몸매는 폐허의 그림자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지만, 감출 수 없는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그녀의 존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아이라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체는 진우의 세계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작고 낮은 소리가 울렸다. “…아직.”

그녀는 인간의 말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지만, 진우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직 안전하지 않다’는 경고였다. 진우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텅 빈 매장 진열대, 부서진 마네킹, 바닥에 뒹구는 상품 잔해들. 모든 것이 종말이 남긴 흔적이었다. 이곳은 인간에게 버려진 땅이었고, 동시에 인간이 아닌 것들이 활개 치는 영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라는 그 ‘인간이 아닌 것’들 중 하나였다.

갑자기 아이라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한곳에 고정되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아이라의 변화는 항상 위험의 징조였다. 그녀의 감각은 인간을 훨씬 능가했다.

“…무슨 일이야?” 진우가 숨죽여 물었다.

아이라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진우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폐허가 된 벽 너머를 응시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라의 얼굴에는 미약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쩌적, 하는 소리가 먼 곳에서 울렸다. 깨진 콘크리트 조각이 밟히는 소리였다. 진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었다. 이 황량한 곳까지 발을 들인 인간 생존자들. 그리고 그들이 아이라를 발견하면, 둘 모두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따를 터였다.

“숨어!” 진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아이라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낡은 창고였다. 녹슨 철문은 비명을 지르며 열렸고, 그 안은 박스와 파손된 선반들로 가득했다. 진우는 아이라를 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도 몸을 구겨 넣었다. 철문은 닫히지 않고 삐걱이며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바깥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러 명이었다. 거친 숨소리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짐승을 쫓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다! 빌어먹을, 이 거대한 건물이 완전히 텅 빌 리가 없어!”

“조용히 해, 제이콥. 괴물이라도 불러오고 싶어?”

괴물. 진우는 자신의 옆에 바싹 붙어있는 아이라를 내려다봤다. 아이라는 몸을 웅크린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꿰뚫어 볼 듯한 예민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인간들에게 ‘괴물’로 불리는 존재였다. 그들의 눈에는 섬뜩한 이형(異形)일 뿐이었다.

발소리가 창고 문 바로 앞을 지나쳤다. 진우는 총을 꽉 쥐었다. 그들의 대화가 귀에 박혔다.

“저번에 잡은 건 털이 너무 많아서 쓸모가 없었어. 이번엔 좀 쓸 만한 걸 찾아야 한다고.”

“식량이라면 더 좋고. 아니면… 저것들을 죽여서라도 가져와야지.”

‘저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우는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이 폐허에 숨어사는 모든 것들. 아이라도 그 범주에 속했다. 만약 그들이 아이라를 발견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들은 아이라를 사냥감으로 여기거나, 더 끔찍한 방식으로 이용할 것이다. 인간들이 ‘괴물’에게 행하는 잔혹함은 진우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정적 속에서, 아이라의 손이 진우의 옷자락을 약하게 그러쥐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진우는 그 안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만 했다.

그때, 밖에서 한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봐, 여기 창고가 있잖아. 혹시 모르니 확인해보자.”

철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우는 숨을 죽였다. 아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심장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바깥 남자의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삐걱이는 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진우는 총구를 바짝 들어 올렸다. 밖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마쳤다. 아이라를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라의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녀의 손이 진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의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낮고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오려는 듯했다. 그르렁거리는, 짐승에 가까운 소리였다.

“쉬잇!” 진우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녀의 짐승 같은 본능이 인간의 이성을 뚫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들키면 끝이었다.

밖의 남자가 문을 반쯤 열었다. 어두운 창고 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진우는 빛에 가려진 어둠 속에 몸을 바싹 숨기고 남자의 실루엣을 노려봤다. 남자는 한 손에 플래시를 들고 안으로 비췄다. 빛이 박스 더미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없네. 젠장, 시간 낭비였군.”

남자가 투덜거리며 플래시를 거뒀다. 그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진우는 아이라의 눈빛이 다시 한번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코끝이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냄새? 진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남자의 냄새,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감지한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발치에 있는 낡은 상자를 향했다. 진우는 재빨리 그 상자를 발로 밀었다. 쾅! 하는 둔탁한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렸다.

“젠장, 뭐야?!”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플래시를 창고 안으로 비췄다. 이번에는 더 깊숙이, 구석구석을 훑었다.

진우는 아이라를 끌어안고 박스 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상자를 밀어낸 것은 일종의 교란이었다. 다행히도, 남자는 그저 오래된 상자가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젠장할, 빌어먹을 쥐새끼들. 어쩐지 냄새가 나더라니.” 남자는 욕설을 뱉으며 문을 닫았다. 쾅!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제야 진우는 아이라의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뗐다. 아이라는 진우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짐승의 습성을 억누르려 애쓴 흔적이었다. 진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이라. 이제 괜찮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바깥의 발소리와 목소리가 완전히 멀어졌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텅 빈 백화점은 다시 고요한 폐허로 돌아와 있었다.

“가자.” 진우는 아이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라가 조용히 진우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진우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백화점의 부서진 창문을 통해 조용히 빠져나왔다.

잿빛 도시 위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폐허를 물들이자, 부서진 건물들의 실루엣이 더욱 음산하게 다가왔다. 진우는 아이라를 이끌고 허물어진 아파트 단지 뒤편에 있는 은신처로 향했다. 그곳은 진우가 발견한 곳이었다. 아이라의 종족이 접근하기 힘든 곳. 그리고 인간들 또한 쉽게 찾지 못하는 곳.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바위틈에 숨겨진 입구를 통과하자, 작지만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다. 진우는 간이 등불을 켜 어둠을 밝혔다.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감돌았다.

아이라가 진우를 돌아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더 이상 짐승 같은 날카로움은 없었다. 대신 깊은 슬픔과 함께 진우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진우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가는 팔이 진우의 허리를 감쌌다.

“…위험했어.” 아이라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진우의 목덜미에 닿았다. 인간의 온기와는 다른, 서늘하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체온이 진우에게 전해졌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진우는 아이라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알 수 없는 숲의 향기가 났다. “너도 나를 지켜줬고.”

오늘 그녀의 감각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미 그 인간 사냥꾼들의 손에 잡혔을 것이다. 그녀의 ‘이질성’이 그를 구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이질성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영원히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을 터였다. 그는 인간이었고,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이라가 고개를 들어 진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등불 빛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났다. 그 안에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넘실거렸다. 금지된, 그러나 너무나도 강렬한 감정.

진우는 그녀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피부는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사랑해, 아이라.”

그녀는 진우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듯했다. 아이라는 진우의 손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진우…”라고 속삭였다. 그녀가 발음하는 그의 이름은 세상 어떤 언어보다 아름답게 들렸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폐허 속에서 피어난 한 조각 희망과도 같은 이 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위험이, 또 다른 ‘괴물’ 사냥꾼들이 그들의 평화를 위협할 터였다.

그때였다. 은신처 밖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단순한 짐승의 울부짖음과는 달랐다. 거대하고 사악한, 이 폐허의 심장에서 기어 나온 듯한 불길한 소리였다. 진우와 아이라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밤의 사냥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그 사냥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