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먼지가 덮인 하늘 아래, 낡아빠진 오프로드 차량이 덜컹거리며 폐허가 된 도로를 달렸다. 한때 번화했을 도시의 잔해들은 마치 거대한 조형물처럼 음산하게 늘어서 있었고, 군데군데 무너진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을 드러낸 채 희뿌연 공기 속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야, 김현우. 이거 맞아? 저번엔 분명 저쪽이라고 우겼잖아.”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서연이 잔뜩 때 묻은 지도 조각을 펴들고 불평했다. 지도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낡아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의 통통한 볼에는 먼지가 살짝 앉아 있었지만, 큰 눈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빛났다.

운전대를 잡은 김현우는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무신경하게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저번엔 저쪽이 ‘그나마’ 괜찮았고, 이번엔 이쪽이 ‘그나마’ 나은 것 같다고 판단한 거야. 판단력과 논리력의 차이지, 박서연.”

“칫, 치사하게 과학 용어 남발하지 마. 아무튼, 기름은 넉넉한 거지? 오늘 저녁은 통조림 참치로 파티라도 해야 할 판인데, 길바닥에 주저앉으면 곤란하다고.” 서연은 쨍하게 빛나는 눈으로 대시보드 위 기름 게이지를 힐끗 쳐다봤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너 통조림 참치만 나오면 파티래. 그리고 기름은… 아슬아슬해. 그래서 이쪽 폐기물 처리장을 노리는 거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과거에 지역 대형 마트와 재활용 센터가 복합적으로 있던 곳의 잔해였다. 소문에 따르면, 지하 창고에 아직 쓸 만한 보급품들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생존자들 사이의 소문이란 대부분 허풍과 과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현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을 택했다.

차량이 마침내 목적지에 멈춰 섰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 사이로, 한때는 깔끔했을 마트의 철골 구조물이 엿보였다. 간판은 녹슬고 찢겨 알아볼 수 없었고, 주변은 온갖 쓰레기와 폐기물로 뒤덮여 있었다.

“으아, 냄새 봐. 완전 쓰레기 산이네. 여기가 진짜 ‘보급품의 보고’ 맞냐?” 서연은 코를 막고 투덜거렸다.

현우는 배낭을 챙기며 침착하게 말했다.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 지하 창고는 접근하기 어려워서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자, 비상용 랜턴이랑 권총 잘 챙겼지?”

“당연하지! 내 목숨보다 소중한 내 짝꿍인데.” 서연은 허리에 찬 작은 권총을 톡톡 두드렸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이미 경계심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곳은 황폐한 세상의 생존자들이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위험한 공간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철골이 뒤틀린 채 아슬아슬하게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고, 발밑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콘크리트 파편들이 밟혔다. 먼지 섞인 햇빛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희미하게 쏟아져 내렸고, 그 빛줄기 사이로 먼지들이 춤추듯 날아다녔다.

“저기 봐, 현우야! 뭔가 길이 있는 것 같아!” 서연이 쿵 소리를 내며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을 밟고 지나가다가 외쳤다.

현우는 서연의 뒤를 따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 조심해. 아무데나 밟지 말고. 지반이 불안정하다고.”

“뭐 어때, 튼튼하구만!” 서연은 이미 저만치 앞서나가 무너진 계단 난간을 붙잡고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 입구였다.

“박서연! 기다려! 무작정 들어가지 마!” 현우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서연이 발을 내딛는 순간,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난간이 힘없이 부러져 버렸다.

“꺄악!”

서연의 몸이 휘청이며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무너진 난간을 뛰어넘어 그녀가 떨어진 곳으로 몸을 던졌다.

“박서연! 괜찮아?!”

“으으… 아파 죽겠네… 등짝이 운명을 달리한 것 같아.”

현우가 랜턴을 비추자, 서연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엉덩이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깊은 곳은 아니었고, 등 뒤에는 쓰레기 더미가 쿠션 역할을 해준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난간이 이리 허약할 줄 알았나! 이 건물도 겉만 멀쩡했지 속은 골병 들었네!” 서연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현우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허리를 살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움직일 수 있겠어?”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짚었다. 서연은 그의 손길에 살짝 움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멀쩡해, 멀쩡해! 나 박서연이 이 정도에 죽을 줄 아나! 아, 잠깐만…”

그녀가 다시 몸을 움직이려 하자, 묵직한 통증이 허리를 파고들었다. 서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현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통증에 그녀의 몸이 현우에게로 기울었고, 둘의 얼굴이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졌다.

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서연의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흙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그녀의 뺨이, 그러나 여전히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흘렀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서연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끄러워! 너나 다친 데 없는지 제대로 보라고!” 현우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투박하게 말했다. 그의 귀 끝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행히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서연은 현우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섰다. 둘은 랜턴 불빛에 의지해 지하 통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통로는 예상보다 훨씬 길고 복잡했다. 쥐가 찍찍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곳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으… 왠지 으스스한데?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아.” 서연이 현우의 팔을 꼭 붙들었다.

“유령보다 더 무서운 건 이 세상에 널린 인간들이야.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고, 경계 늦추지 마.” 현우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녀가 팔을 붙잡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잡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윽고 거대한 지하 창고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창고는 랜턴 불빛에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낡은 선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그 위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와! 여기 봐! 통조림! 대박! 완전 부자 된 기분이야!” 서연이 선반에 가득 쌓인 통조림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이미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반짝였다.

하지만 현우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창고 안쪽 깊숙한 곳, 다른 선반들과 달리 거대한 강철 문으로 굳게 닫힌 작은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 문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낡은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저기… 뭔가 있어.” 현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난 통조림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서연이 통조림 캔을 잔뜩 안아 들고 오며 말했다.

“저기, 저 강철 문 안쪽에. 단순한 보급품 창고가 아닌 것 같아.” 현우는 직감적으로 뭔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과거 마트의 지하 창고치고는 너무 견고한 문이었다.

그들은 강철 문으로 다가갔다. 문은 두꺼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고, 녹슨 자물쇠가 여러 개 채워져 있었다. 일반적인 도구로는 열기 힘들어 보였다.

“이건… 정말 뭔가 있는데?” 서연도 이제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문을 살폈다.

“아무래도 특수 용도로 쓰였던 곳인가 봐. 보관 금고 같은 거였을지도.” 현우는 쇠사슬을 만지작거렸다. “이걸 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황량한 지하 창고의 정적 속에서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현우와 서연은 동시에 몸을 굳혔다.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저… 저거 무슨 소리야?” 서연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녀는 이미 품에 안았던 통조림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 권총을 뽑아 들고 있었다.

현우도 재빨리 자신의 권총을 뽑았다.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말고, 다른 손님도 찾아온 것 같네.”

그 순간, 창고 입구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 한 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긴 창고는 그들의 침묵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과연 그들은 이 미지의 침입자로부터 이 귀한 보물 창고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이 강철 문 안에는 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서연이 현우의 팔을 다시 한번 꽉 붙들었다. 현우는 그녀의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응답했다. 그리고 둘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은 언제나 서로의 유일한 빛이자 방패였다. 그리고 이 난장판 속에서, 그들의 알 수 없는 로맨스도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