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운명의 장이 열렸다.

천 년에 한 번,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천하의 운명을 결정하는 천하제일무도회가 바로 그 장소였다. 전설에 따르면, 이 대회에서 우승한 자는 ‘천명인장(天命印章)’을 손에 넣고, 다가올 대혼란의 시대를 막아낼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고 했다. 한 마디로, 개개인의 영광은 물론, 세상의 운명까지 이 어깨에 달려 있다는 거창한 이야기였다.

장마가 한창이던 어느 해 여름, 수많은 고수들이 각자의 문파와 신념을 짊어지고 비룡곡 무도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온 무림이 벌벌 떤다는 강호 맹주급 인물들도 있었고,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신진 고수들도 있었다.

그 신진 고수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이는 ‘화월당’의 막내 사저, 한소리였다.

“크아아악! 어제 마신 술이 아직 안 깨네!”

새벽부터 쩌렁쩌렁 울리는 그녀의 기합 소리에 화월당의 노사부는 이마를 짚었다. 스승은 소리가 무술 실력은 출중하나, 지나치게 불같은 성정을 타고났다고 늘 한숨 쉬었다. 그 불같은 성정은 지금도 그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번 대회, 반드시 제가 우승해서 천명인장을 받아올 겁니다! 그리하여 화월당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고, 그 깐깐한 강호 맹주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소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에 찬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강호 맹주란, 늘 잔소리만 늘어놓고 젊은 고수들을 무시하는 꼰대 집단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소문만으로도 천하를 흔든다는 ‘태풍검’ 강태풍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태풍. 무림의 젊은 고수 중 최고봉으로 불리는 인물. 검 한 자루로 폭풍을 일으킨다는 기인이었다. 하지만 소리의 기억 속에 강태풍은 재수 없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우승컵을 들어 올리던, 어딘가 건방진 사내였다.

“흥, 이번엔 그 태풍검인지 뭔지 하는 사람도 날 똑바로 보게 될 걸!”

소리는 무도장으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호기를 부렸다.

* * *

무도장에 도착하자 이미 수많은 고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소리는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저 멀리,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마치 주변의 모든 소음을 흡수하는 듯, 혼자만의 고요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날카로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그리고 차가운 듯 완벽한 콧날.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소리의 눈에는 그저 건방짐의 극치로 보였다.

‘저 재수 없는 인간! 강태풍이 분명해!’

강태풍이었다. 소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소리 쪽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웃었어? 날 비웃은 건가?’

소리는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저 거만한 미소는 뭐지?

“야! 거기 태풍검!”

그녀가 소리쳤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일순간 멈췄다. 모든 시선이 소리와 강태풍에게 쏠렸다. 강태풍은 천천히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미소가 서려 있었다.

“나 말이냐?”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래 너! 이번 대회, 내가 우승할 거니까! 감히 날 비웃었다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야!”

소리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씩씩하게 외쳤다. 강태풍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피식, 하고 다시 한번 웃었다.

“재밌군.”

그의 짤막한 답변에 소리의 얼굴은 삽시간에 붉어졌다. 재미있다고? 지금 날 놀리는 건가?

그때,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대회는 예상대로 강태풍의 독무대였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 하나로 상대방의 무기를 쳐내거나, 발차기 한 번으로 균형을 무너뜨릴 뿐이었다. 그의 경기는 항상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압도적이었고, 동시에 소리에겐 참을 수 없는 오만함의 상징이었다.

반면 소리는 매 경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날카로운 검술과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며 연승을 거뒀다. 하지만 매번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그녀는 기진맥진한 채로 경기장을 내려올 때마다,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강태풍을 발견했다.

“젠장, 저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인가?”

소리는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느 날 저녁, 소리는 다음 경기 상대의 약점을 분석하기 위해 식당 구석에 앉아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맞은편 의자가 삐걱거렸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강태풍이었다.

“뭐… 뭐예요? 왜 여기 앉아요?”

소리가 놀라 소리치자, 강태풍은 아무렇지도 않게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그는 소리가 시키려던 메뉴인 ‘매운 갈비찜’을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소리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시키려던 건데…!”

“먼저 앉았으니까 내가 먼저.”

“치사해!”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리는 강태풍을 곁눈질하며 몰래 노트를 치웠다. 저 인간에게 약점을 들킬 수는 없지!

“다음 경기, 네 상대는 주먹이 꽤 매서울 거다.”

강태풍이 불쑥 말했다. 소리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뭘 아는 척해요? 난 내 방식대로 싸울 거예요!”

“네 발목 움직임은 예측하기 쉽다. 특히 오른발.”

그의 말에 소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오른발 움직임은 화월당에서조차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사소한 버릇이었다. 강태풍은 그런 소리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네 검 끝은 강하고 빠르다. 쓸데없는 움직임을 줄인다면 더 강해질 텐데.”

소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정확히 그녀의 약점과 강점을 꿰뚫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그의 오만함 뒤에 숨겨진 예리한 통찰력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우승은 내가 할 테니까.”

하지만 이내 강태풍은 다시 그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자존심을 긁었다. 소리는 다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들으면 벌써 우승한 줄 알겠네! 두고 봐요,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그들의 식사는 티격태격하는 말다툼으로 끝이 났다. 소리는 밤새 강태풍의 조언을 곱씹으며 자신의 검술을 점검했고, 다음 날, 놀랍도록 안정적인 자세로 상대를 제압하며 승리했다. 그녀는 경기장 한구석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강태풍을 발견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은 이제 더 이상 비웃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좀 설렌다고나 할까.

* * *

대회는 빠르게 결승전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결승에 오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한소리와 강태풍이었다.

온 무림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두 사람은 비룡곡 무도장의 중앙에 섰다. 무겁고도 흥분된 침묵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설마… 내가 결승에서 당신이랑 싸울 줄은 몰랐네.”

소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짜증 대신 미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나도 네가 여기까지 올라올 줄은 몰랐다.”

강태풍의 대답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그의 눈빛은 전과는 달랐다. 흥미로움과… 어딘가 모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흥, 이번엔 날 똑바로 보게 될 거야!”

소리는 다시 한번 기합을 넣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 더 이상 강태풍의 조언이나 비웃음은 없었다.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그를 넘어서야 했다.

징 소리가 울리고, 결승전이 시작됐다.

소리는 시작부터 전력을 다했다. 화월당의 비기인 ‘화월유영검’을 펼치자, 그녀의 검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불꽃처럼 매서웠다. 관중들은 숨을 죽이며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하지만 강태풍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는 검을 뽑지 않은 채, 맨손으로 소리의 검을 막아냈다. 그의 움직임은 최소한이었지만, 그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했다.

‘젠장, 이 인간은 대체 뭐야!’

소리는 땀방울이 맺히는 이마를 훔치며 더욱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러다 그녀의 검이 강태풍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검을 뽑았다.

쉭-!

날카로운 검집 마찰음과 함께 강태풍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태풍검. 그 이름처럼 그의 검은 폭풍 그 자체였다. 거대한 바람이 경기장을 휘감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소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녀의 전신을 옥죄는 듯했다.

“크윽…!”

그의 검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아찔한 상처가 남을 뻔했다. 소리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숨을 고르며 강태풍을 노려봤다.

“진심으로 싸우는 건 처음이네, 태풍검.”

“너를 상대로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강태풍의 눈동자에선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만함이 아닌, 진정한 승부사의 열정이었다. 소리는 그 눈빛을 보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그를 향해 품었던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짜증, 오만함, 그리고… 묘한 두근거림.

강태풍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더욱 빠르고, 더욱 강력하게. 소리는 필사적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가 무도장을 가득 채웠다. 그들의 움직임은 예술과 같았고, 동시에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였다.

격렬한 공방이 이어지던 중, 소리는 순간적으로 강태풍의 검을 쳐내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노림수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녀의 검 끝이 그의 심장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태풍은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휘두르는 대신, 갑자기 손을 뻗어 소리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소리는 중심을 잃고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녀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의 심장 대신 그의 단단한 가슴에 그녀의 얼굴이 파묻혔다.

온 경기장이 정지한 듯 고요해졌다.

소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녀의 코끝에는 그의 남자다운 체향이 가득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이게 무슨…!”

“졌다.”

강태풍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미묘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네 검은 강했고, 틈을 노리는 건 훌륭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널 공격할 수 없어.”

그는 소리를 품에 안은 채,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

“왜… 왜 날 공격할 수 없다는 거예요?”

소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며 물었다. 하지만 강태풍의 팔은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피식,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은 이제 더 이상 건방지거나 비웃음이 아니었다. 사랑스럽다는 듯한, 장난기 어린 웃음이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의 말에 소리의 얼굴은 폭발할 듯 붉어졌다. 예쁘다고? 지금 결승전 한가운데서 고작 그런 이유로?

“지금… 지금 장난해요?! 천하의 운명이 달린 대회인데, 고작 그런…!”

“천하의 운명? 난 모르겠고. 내 운명은 이미 여기 있는 것 같아서.”

강태풍은 소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말은 너무나도 진지했고, 동시에 너무나도 뻔뻔했다.

그 순간, 대회의 심판장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가… 강태풍! 기권입니까?!”

강태풍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소리를 더욱 품에 끌어안았다.

“기권이다. 승리는 저 화월당 막내 사저에게.”

“말도 안 돼! 난 인정 못 해! 당신, 이거 반칙이야!”

소리는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짜증이 아닌, 당황스러움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태풍은 그녀의 반항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반칙? 그래, 뭐. 반칙이라 하자.”

그는 소리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소리는 충격에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이번 대회에서 천명인장을 얻진 못해도, 천명을 얻은 것 같으니까.”

경기장은 여전히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천하제일무도회 결승전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우승은 얼떨결에 한소리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천명인장을 손에 넣었지만, 그 인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강태풍의 마지막 말과, 이마에 닿았던 그의 입술의 감촉만이 맴돌았다.

대회는 그렇게 황당한 로맨틱 코미디로 막을 내렸다. 천하의 운명은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한소리와 강태풍의 운명은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대회 이후, 강호에는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태풍검이 화월당 막내 사저한테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더라!”
“매일같이 화월당에 가서 어설픈 추파를 던진다는데?”
“막내 사저는 여전히 틱틱거리지만, 얼굴은 매일 빨개져 있다던데?”

그리고 한소리는 매일같이 강태풍과 싸우고 투닥거렸다.

“야! 거기 태풍검! 오늘은 또 왜 왔어? 연습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글쎄, 내 운명을 지켜줘야 할 것 같아서.”

“흥! 같잖은 소리! 난 내 운명 내가 알아서 지켜! 그리고… 다음 대회에서는 반드시 당신을 제대로 이길 거야!”

그녀의 말에 강태풍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천하의 운명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함께 그 운명을 만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투닥거리면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깊어져만 갔다. 무림의 고수들은 여전히 그들을 보며 혀를 찼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회자될 로맨틱 코미디 전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