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덮인 황무지. 강하준은 거대한 강철 괴물, ‘방랑자’의 조종석에 앉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폐허를 응시했다. 무릎까지 오는 먼지 구덩이와 뼈대만 남은 마천루의 잔해가 온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2년 전, 모든 것이 무너진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이 차가운 강철 덩어리 없이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방랑자’는 낡고 여기저기 땜질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오늘도 아무것도 없군.”
하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조종석 내부의 공기 여과기는 연신 윙윙거렸지만, 바깥세상의 퀴퀴한 먼지 냄새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연료 게이지는 위험 수위로 내려와 있었고, 식량 창고는 텅 비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스캐너 화면을 훑었지만, 희미한 신호조차 잡히지 않았다.
“젠장, 이대로는….”
그는 한숨을 쉬며 ‘방랑자’의 조종간을 꽉 쥐었다. 이 거대한 기계의 철심 박힌 심장이 마치 자신의 심장처럼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느리지만 묵직한 발걸음이 황무지에 울려 퍼졌다. 끝없이 펼쳐진 회색 세상 속에서 그는 홀로 나아갔다.
그때, ‘방랑자’의 센서가 미약한 반응을 보였다. 스캐너 화면에 희미한 녹색 점이 깜빡였다. 건물 잔해였다. 다른 곳보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듯한, 거대한 물류 창고의 흔적이었다. 하준의 눈에 희망의 불씨가 스쳤다.
“이런 곳에 아직 남아있는 게 있었다니.”
그는 조심스럽게 ‘방랑자’를 조종하여 건물 잔해에 접근했다. 거대한 강철 문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내부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곳일수록 위험한 법이었다. 자원이 남아있다면, 필시 다른 생존자나, 혹은 그보다 더한 것들이 둥지를 틀고 있을 터였다.
‘방랑자’의 거대한 팔에 달린 작업등이 어둠 속을 비췄다. 흙먼지와 잔해 속에서 낡은 박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은 텅 비어있거나 부패한 내용물뿐이었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방랑자’를 움직여 내부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혹시 모를 함정에 대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때, 조종석 옆면의 센서가 붉은색으로 번쩍였다. 경고음이 울렸다.
“이게 무슨…!”
바닥에서, 천장에서, 벽면의 갈라진 틈새에서 수십 개의 검고 날카로운 다리들이 튀어나왔다. 녹슨 강철과 날카로운 파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철거미’ 떼였다. 그들의 몸은 마치 과거의 기계 잔해들이 뭉쳐진 것처럼 보였고, 여섯 개의 눈은 붉은 섬광을 뿜어냈다. 굶주림에 찬 거미들이 하준의 ‘방랑자’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젠장, 이런 곳에 숨어있었을 줄이야!”
하준은 재빨리 반응했다. ‘방랑자’의 오른팔에 장착된 낡은 개틀링 건이 굉음을 내며 불을 뿜었다. 타타타탕! 쇳덩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선두에 서있던 철거미 두 마리가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그들은 끝없이 몰려들었다. 철거미들은 날카로운 다리로 ‘방랑자’의 장갑을 긁어댔고, 키틴질 같은 외골격에 부딪히는 소리가 조종석까지 울려 퍼졌다.
“어림없어!”
하준은 조종간을 틀어 ‘방랑자’를 회전시켰다. 육중한 강철 몸체가 거미 떼를 휩쓸었고, 몇 마리가 벽에 부딪혀 부서졌다. 그러나 그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한 마리가 ‘방랑자’의 왼쪽 다리에 달라붙어 날카로운 송곳니로 장갑을 뚫으려 했다. 찌직, 찌직. 스파크가 튀었다.
“이 자식!”
하준은 왼팔의 커터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낡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이 거미의 다리들을 단번에 잘라냈다. 거미는 비명을 지르듯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장 큰 개체인 듯한 ‘알파’ 거미가 천장에서 하준을 덮쳤다.
콰아앙!
‘방랑자’의 조종석이 흔들렸다. 시야가 흐트러지고, 경고음이 더욱 크게 울렸다. 방어막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알파 거미는 ‘방랑자’의 어깨에 달라붙어 무시무시한 송곳니로 조종석을 향해 뚫고 들어오려 했다.
“이대로 당할 순 없지!”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재빨리 ‘방랑자’의 에너지를 무기 시스템에 최대로 집중시켰다. 개틀링 건의 회전 속도가 한계까지 올라갔다.
“받아라!”
그는 알파 거미의 머리를 향해 맹렬하게 사격을 퍼부었다. 탄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미의 단단한 외골격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붉은 섬광을 뿜던 눈들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알파 거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방랑자’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히며 거대한 몸체가 산산조각 났다.
선두가 무너지자, 나머지 철거미들도 잠시 주춤했다. 하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방랑자’를 전진시키며 개틀링을 난사하고,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낡은 창고 안은 강철이 부서지고 파편이 튀는 지옥도가 되었다.
마지막 거미 한 마리가 코너에서 숨어있다가 기습적으로 덤벼들었다. 하준은 ‘방랑자’의 팔로 거미를 움켜쥐었다. 찌직, 찌직! 거미는 버둥거렸지만, 낡았어도 강철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거미를 바닥에 내리찍어 완전히 부숴버렸다.
조용해진 창고 안. ‘방랑자’의 온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여기저기 깊은 상처들이 남아있었다. 하준은 깊은 숨을 내쉬며 조종석에 등을 기댔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이 밀려왔다.
“젠장, 정말 아슬아슬했군.”
그는 ‘방랑자’의 손상 보고서를 훑었다. 여러 부품이 파손되었고, 연료 소모도 심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식량도, 물도, 쓸만한 부품도 없었다. 거미들이 먹고 살았던 건 이 낡은 창고의 부식된 강철뿐인 듯했다.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이 스쳤지만, 이내 사라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방랑자’는 다시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잿빛 황무지로 향했다. 석양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지평선 너머로, 하준은 또다시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생존은 끝났지만, 내일의 생존은 또다시 시작될 터였다. 그의 낡은 강철 괴물이 내딛는 쿵, 쿵 하는 발걸음만이 고요한 황무지에 울려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