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냄새가 진동했다. 핏빛 노을이 졌다. 아니, 저것은 노을이 아니었다. 절망의 투기장을 감싸는 거대한 붉은 장막, 그 아래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비명은 승자의 환호도, 패자의 통한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깊숙이 각인되는, 존재론적 공포의 메아리였다.
투기장의 중심에는 흙먼지와 함께 핏빛 모래가 깔려 있었다. 그 모래는 셀 수 없는 무림 고수들의 피를 머금고 검붉은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명대전(天命大戰)’의 여덟 번째 대결이 펼쳐지는 ‘묵시록의 제단’이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싸움은 이미 피로 얼룩진 서막을 지나 광기에 젖은 본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류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핏빛 모래를 밟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마치 영혼을 집어삼킨 듯 검붉은 광채를 뿜어냈다. ‘그림자 칼날’이라 불리는 자.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침묵과 피비린내가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검이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그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마다 절규와 함께 생명이 스러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크흐흐흐… 꼬마 녀석. 네 검에서 아직 애송이의 피 냄새가 나는구나. 감히 백골검왕의 앞을 막아서려 하다니, 네 배짱은 높이 사주마.”
상대는 백골검왕이었다. 그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무림인들은 몸서리쳤다. 그의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수많은 생명을 갈취하며 영혼을 흡수한, 살아있는 저주 그 자체였다. 백골검왕은 해골이 박힌 흉갑을 두르고 있었고, 그의 허리춤에는 사람의 뼈로 만들어진 듯한 기괴한 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짐승처럼 번뜩였고, 입술에 걸린 비틀린 미소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즐겨왔는지 짐작하게 했다.
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붉은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상대에게는 더 큰 도발이었다.
“시끄럽다.”
짧고도 차가운 한 마디가 백골검왕의 광기 어린 웃음을 끊어냈다. 그 순간, 백골검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감히 이 백골검왕에게…!”
굉음과 함께 백골검왕이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의 육중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殺氣)는 흡사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백골검왕의 검이 굉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일격이었으나 그 안에는 사람의 내장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듯한 흉악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백골대도(白骨大刀)’라 불리는 그의 검법은 오직 파괴만을 목적으로 했다.
류영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의 검은 궤적을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그러나 정확히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림자 검법(影劍法)’. 그의 검은 빛을 흡수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백골검왕의 거대한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류영의 검은 이미 백골검왕의 팔목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치잉-!
금속음과 함께 검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백골검왕의 흉갑에 깊은 금이 갔으나, 그의 괴물 같은 육체는 단단했다. 그러나 팔목에 스친 상처에서는 검은 피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의 피와는 다른, 검붉은 기운이 스며든 피였다.
“이런 쥐새끼 같은…!”
백골검왕은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의 기괴한 검에서 핏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는 이내 수십 개의 비명 지르는 해골 형상으로 변하더니 류영을 향해 쇄도했다. ‘백골귀령진(白骨鬼靈陣)’! 해골들은 살아있는 듯한 원한을 품고 류영의 사지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 비명 소리는 귓가를 찢고 들어와 정신마저 좀먹는 듯했다.
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검을 한 바퀴 휘둘렀다. 칠흑 같은 어둠이 검신을 감싸고, 그가 움직이는 궤적마다 잔영들이 아른거렸다. 어둠은 해골들을 집어삼켰고, 그 사이로 섬광처럼 뻗어 나간 검은 백골검왕의 팔을 스쳤다.
촤르륵!
이번에는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났다. 백골검왕은 고통 대신 광소했다.
“크흐흐흐! 겨우 이 정도냐? 그림자 칼날이라더니, 그림자에 숨기만 하는 겁쟁이로군!”
그러나 류영의 검이 할퀴고 간 자리는 심상치 않았다. 상처 주변의 피부가 검게 변색되기 시작했고, 썩어가는 듯한 악취가 풍겼다. 류영의 검은 단순한 물리적인 상처만을 입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검은 ‘심연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고, 그것은 생명력을 잠식하는 저주의 검이었다.
백골검왕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 살기가 가득 찼다.
“좋다! 감히 이 백골검왕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너 또한 뼈도 못 추리게 해주마!”
그는 광소하며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용솟음쳤고, 피부는 점차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죽었던 존재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핏줄은 검은 선으로 부풀어 올랐고, 눈동자는 핏빛으로 번뜩였다.
“백골귀왕대검진(白骨鬼王大劍陣)!”
섬뜩한 외침과 함께 그의 검에서 수천 개의 검기가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해골 형상을 이루었다. 해골의 입은 크게 벌어져 마치 투기장 전체를 집어삼킬 듯했다. 묵시록의 제단 위에 드리운 거대한 해골의 그림자는 지켜보는 모든 무림인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이것은 백골검왕의 필살기이자, 그의 검에 흡수된 수많은 원혼들의 절규가 담긴 최악의 검진이었다.
류영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던 검은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그의 검이 낮게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 싸움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멈출 수 없다.’
그의 어깨에는 오직 자신만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단순한 승패가 아니었다. 이 투기장에서 얻어낼 승리는, 다가올 ‘그림자 재앙’을 막을 유일한 희망이었다.
“심연의 그림자(深淵의 그림자)…”
류영의 입술에서 읊조린 주문과 함께 그의 검은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구멍이 되었다. 검은 구멍은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 백골검왕의 거대한 해골 형상을 향해 쇄도했다. 속도는 빛보다 빨랐고, 그 파괴력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릴 듯했다.
콰앙-!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절망의 투기장을 뒤흔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거대한 해골 형상을 꿰뚫었다. 섬뜩한 비명 소리가 투기장을 뒤흔들었고, 백골검왕의 거대한 해골 검진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어둠이 걷히자, 묵시록의 제단 위에는 류영이 홀로 서 있었다. 그의 검에서는 여전히 희미하게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골검왕은 뒤로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에는 이미 그림자에 파먹힌 듯한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그의 핏빛으로 물들었던 피부는 급속도로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마치 미라처럼 말라붙어 가는 그의 몸에서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커헉…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백골검왕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광기가 아닌 순수한 공포로 가득했다. 그의 몸은 이내 모래처럼 부서져 투기장의 핏빛 모래와 하나가 되어갔다.
류영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검에서는 여전히 희미하게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검은 기운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 기운이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관중들은 침묵했다. 그 누구도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오직 류영만이 서 있었다. 살아남은 자가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자격을 얻는 법. 이제 겨우 여덟 번째 관문을 넘었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절망의 투기장을 넘어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향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천하의 운명은 여전히 미지 속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