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진 지 수십 년이 흘렀다. 한때 웅장한 도시였던 곳은 이제 녹슨 뼈대와 뒤엉킨 덩굴의 숲이 되었다.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잊힌 거인의 무덤처럼 말없이 서 있었다. 바람은 풀벌레 소리와 함께 낡은 철판과 깨진 유리창 사이를 휘돌며 쓸쓸한 노래를 불렀다. 이곳이 바로 현우와 아리의 집이었다. 세상이 멈춘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 작은 세상.
현우는 아침 햇살이 창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낡은 천막과 주워온 철판들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그들의 보금자리는 생각보다 튼튼했다. 옆자리에서는 아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작은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며 현우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리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이유였다.
“후으암… 오빠?”
아리가 작은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비볐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햇살이 부서졌다.
“잘 잤어, 아리야?”
현우는 아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리는 칭얼거리며 현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응… 근데 목이 좀 따끔거려. 어제 감나무 아래서 너무 놀았나 봐.”
아리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던 아리의 작은 기침 소리가 떠올랐다.
“괜찮아. 오빠가 특별한 약초를 구해다 줄게. 옛날에 식물원이었던 곳에 가면 ‘은빛 실뿌리’라고 있어. 그거 달여 마시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은빛 실뿌리?”
아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뿌리가 꼭 은색 실타래 같아서 그렇게 불렸대. 맛은 없지만, 목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는 최고지.”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현우는 배낭을 메고 작은 손도끼와 물통을 챙겼다. 아리도 자신만의 작은 천 가방에 어제 주워온 예쁜 조약돌 몇 개를 넣고 현우의 옆에 섰다.
“오늘은 조용히 따라와야 해, 아리야. 식물원 쪽은 덩굴이 너무 많아서 길이 헷갈릴 수 있어.”
“네!”
아리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현우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사는 보금자리는 옛 도시의 가장자리, 무너진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있었다. 식물원까지는 무너진 건물 잔해와 무성한 풀숲을 뚫고 가야 했다. 바닥에는 깨진 보도블록과 이름 모를 꽃들이 뒤섞여 피어 있었다. 현우는 앞장서서 손도끼로 질긴 덩굴을 잘라내며 길을 만들었다. 아리는 현우의 그림자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오빠, 저것 봐!”
아리가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거대한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그 가지 위에는 희미한 푸른빛을 띠는 버섯들이 무리 지어 자라고 있었다.
“예쁘다… 먹을 수 있는 버섯이야?”
“아니, 저건 먹으면 안 돼. 독버섯일 거야. 예쁜 것들 중에는 위험한 게 많단다.”
현우는 아리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웃으며 설명했다. 이 황량한 세계에서 아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은 현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낡은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자, 멀리서 거대한 유리 온실의 잔해가 보였다. 여기가 바로 옛 식물원이 있던 자리였다. 유리 천장은 대부분 깨져 사라졌지만, 그 안에서 자라던 식물들은 더욱 자유롭게 하늘로 솟아올라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습하고 짙은 흙냄새와 함께 이름 모를 풀꽃 향기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는 진흙과 무성한 수풀이 뒤엉켜 있었다.
“은빛 실뿌리는 이 안에서도 좀 더 깊은 곳, 습기가 많고 그늘진 곳에 자란다고 했어.”
현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 우연히 들른 늙은 생존자가 알려준 정보였다.
“오빠, 저기 뭔가 반짝거려!”
아리가 손가락으로 풀숲 안쪽을 가리켰다. 현우가 다가가 보니, 진흙 웅덩이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은색 광택을 띠는 가느다란 줄기들이 흙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뿌리였다.
“찾았다! 은빛 실뿌리!”
현우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헤쳤다. 뿌리는 정말 은빛 실타래처럼 서로 얽혀 있었다. 현우는 필요한 만큼만 뿌리를 캐내어 가방에 넣었다. 아리는 흙투성이가 된 현우의 손을 보며 깔깔 웃었다.
“오빠 손에 흙 묻었다!”
“너도 흙투성이잖아.”
현우는 아리의 코에 살짝 흙을 묻혔다. 아리는 꺄르르 웃으며 현우에게 안겼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식물원 잔해에 울려 퍼졌다.
뿌리를 다 캐낸 후, 그들은 식물원 한편에 있는, 그나마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작은 연못가에 앉았다. 맑은 물 위에는 수련 잎이 둥둥 떠 있었고,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아리야, 목 안 아파?”
현우가 물통을 건넸다. 아리는 물을 홀짝 마시고는 맑은 눈으로 연못을 응시했다.
“오빠, 저기 저 물고기 봐. 우리 집 물고기보다 더 작다.”
그들의 보금자리에는 현우가 주워온 유리병에 키우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다. 아리는 그 물고기를 ‘파랑이’라고 불렀다.
“응. 여기가 더 넓으니까 물고기도 많겠네.”
현우는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연못도 언젠가는 다른 짐승들의 목마름을 축여주는 오아시스가 될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쉽고 가벼웠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안도감과, 아리의 밝은 웃음 덕분이었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며 무너진 건물들의 실루엣을 붉게 물들였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보금자리에 도착하자마자 현우는 깨끗한 물을 끓여 은빛 실뿌리를 넣고 달였다. 뿌리가 우러나자 물은 옅은 노란빛을 띠었다. 작은 컵에 따라 식힌 후 아리에게 건넸다.
“맛없어도 꼭 다 마셔야 해, 아리야.”
아리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으으… 맛없어…”
“그래도 다 마시면 목이 하나도 안 아플 걸?”
현우의 말에 아리는 꾸역꾸역 쓴 약물을 전부 마셨다.
밤이 깊어지자,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현우는 아리와 함께 천막 바깥,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 위에 걸터앉았다. 도시의 빛이 사라진 세상에서, 밤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오빠, 저 별들은 옛날에도 저렇게 많았어?”
아리가 물었다.
“응. 옛날에도 저렇게 많았지. 다만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밝은 불빛 때문에 보지 못했을 뿐이야.”
현우는 아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리의 작은 몸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많단다. 저 별들처럼,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는 것처럼.”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우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달콤한 잠이 서서히 아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현우는 아리의 작은 숨소리를 들으며 멀리 보이는 희미한 별똥별을 바라보았다. 황폐해진 세상에서, 그들은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작고 소박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삶.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기다릴지 알 수 없지만, 이 작은 온기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현우의 가슴 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처럼, 그들의 삶도 그렇게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