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목: 피의 서약 (血의 誓約)**

차가운 습기가 뼈마디를 파고들었다. 잊힌 지하 납골당, 한때 위대한 마법사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던 곳은 이제 거미줄과 먼지, 그리고 스산한 침묵만이 지배하는 죽은 공간이었다. 낡은 석실의 중앙, 부서진 제단 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칸. 한때 아르카나 대륙을 호령하던 왕국의 검, ‘푸른 별’이라 불리던 기사단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모습은 영광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림자 속에 숨어 복수를 꾀하는 망령과 다름없었다.

칸의 손에는 낡고 해진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수천 년 전 봉인된 존재를 불러내기 위한 금단의 의식서. 이 의식을 통해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자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희미하게 떨렸다.

“라이언…….”

낮게 읊조린 이름은 증오와 슬픔, 그리고 과거의 아련한 잔해가 뒤섞인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그 찬란했던 날들, 세계를 함께 바꾸자고 맹세했던 어제의 동지가, 등에 칼을 꽂아 넣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왕국의 가장 높은 탑에서, 나의 손을 붙잡고 웃던 너의 얼굴이, 이제는 나를 집어삼키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 되었다.*

칸은 눈을 감았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환상. 믿음이 배신으로 변하던 그 순간의 시퍼런 칼날, 뜨거웠던 피의 감촉, 그리고 무너져 내리던 세상의 비명.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날의 아픔은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지만, 동시에 지울 수 없는 복수의 불꽃을 지폈다. 그것은 타오르는 지옥 불길처럼 그의 영혼을 좀먹으면서도, 동시에 그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나는 기필코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네게는 그 배신에 대한 천 배, 만 배의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제단 중앙에 놓인 검은 수정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자마자 수정구는 희미하게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피처럼 진득하고 위험한 빛이었다.

의식의 시작.

칸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어둠보다 깊은 검은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검은 피. 아르카나의 전설에만 존재하던, 금지된 마물 ‘고대 그림자 제왕’의 심장 혈액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고, 검은 피를 수정구 주변의 홈에 따라 흘려보냈다. 진득한 액체가 낡은 돌 틈을 타고 흐르자, 차가운 석실의 공기가 이질적인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주변의 어둠이 술렁였다. 벽에 새겨진 고대 문자들은 붉은빛을 머금고 꿈틀거리는 뱀처럼 생동하기 시작했다. 칸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지만, 그 어떤 웅장한 합창보다도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수천 년 전 사라진 고대 마법의 언어, 세계의 근원을 뒤흔드는 원초적인 진동이었다.

“오크툰 느리크 사르크, 에샤르 멜카이 템페르…”

단어 하나하나가 내뱉어질 때마다 제단 위의 수정구는 더욱 격렬하게 진동했다. 붉은 피의 광채는 점차 강렬해져 석실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며 기괴한 형상으로 춤을 추었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비명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과거의 영혼들이 절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네 명예를 되찾고 싶다면, 네 복수를 이루고 싶다면, 이 고통을 견뎌라, 칸!”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칸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신경이 불타는 듯했다. 고대 마법의 기운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살갹을 찢고 뼈를 녹이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금단의 영역. 하지만 지금의 칸에게는 두려움이란 없었다. 오직 복수만이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검은 피가 수정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정구는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격렬하게 고동쳤고, 그 안에서 어둠이 소용돌이쳤다. 그 중심에는 미약하지만 확실한, 존재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콰앙!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석실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리고, 제단 주변의 낡은 기둥들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검은 수정구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어둠의 파동이 칸의 몸을 강타했다. 온몸의 세포가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그를 집어삼켰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칸은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라이언에게 유린당했던 자신의 명예, 사랑했던 이들의 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존재 이유가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릴 터였다.

“나는…… 무너지지 않아……!”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칸은 수정구를 노려봤다. 그의 심장 박동이 고대 마법의 진동에 맞춰 격렬하게 울렸다. 검은 피와 붉은 마법의 기운이 뒤섞여 기괴한 검붉은 빛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체가 없는 어둠의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영혼을 꿰뚫는 듯한 냉기,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태초의 어둠 그 자체인 듯한 위용이 석실을 가득 채웠다. 고대 그림자 제왕의 조각난 영혼이었다. 봉인에서 풀려난 존재는 칸을 향해 검고 거대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칸의 심장을 움켜쥐는 순간, 그는 아득한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고,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 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받아들이듯 두 팔을 벌렸다.

어둠의 존재는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칸의 피부 위로 검은 문신이 돋아났고, 그의 눈은 깊은 밤하늘처럼 검게 물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잔혹하며, 압도적인 파괴의 힘이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 석실을 뒤흔들던 진동도, 비명 소리도, 붉은 빛도 사라졌다. 오직 침묵과 어둠만이 다시 찾아왔다. 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이제 빛 한 점 없이 깊고 검은 심연을 담고 있었다.

그의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위에 희미하게 검은 안개가 피어났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안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절대적인 힘이었다. 어둠을 다루는 자, 그림자의 지배자. 그는 이제 더 이상 ‘칸’이라는 이름의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칸은 낮게 웃었다. 피가 섞인 듯한 씁쓸한 웃음이었다.

“라이언…… 네가 무너뜨린 것은 나약한 인간 칸이었다. 이제 네게 찾아갈 자는, 너를 집어삼킬 그림자다.”

석실의 문을 박차고 나섰다. 어둠 속에서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은, 피와 복수로 얼룩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터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이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복수.
그것만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