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4호의 침묵
밤 열 시 정각, 김현우는 거대한 디지털시계 대신 자신의 낡은 노트북 액정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은 빌딩 숲의 잔잔한 불빛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704호 아파트는 고요했다. 혼자 사는 남자치고는 꽤 정갈하게 정리된 원룸은 현우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깔끔한 책상 위에는 디자인 작업용 태블릿과 무선 마우스, 그리고 다 식은 커피가 담긴 머그잔이 전부였다.
“후으…”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현우는 허리를 쭉 폈다. 어깨와 목덜미가 뻐근했다. 마감일이 임박한 프로젝트는 며칠째 그를 잠 못 들게 했고,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달했다. 결국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책상 모퉁이에 굴러떨어진 펜 하나가 현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분명 작업하는 내내 제자리에 놓여있던 파란색 볼펜이었다. ‘내가 언제 펜을 여기다 뒀지?’ 현우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펜을 주워 필통에 도로 꽂았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보다.
부엌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냄비에 물을 받고 인덕션 위에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훑어보았다. 피곤함은 여전했지만, 따뜻한 물이 끓는 소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런데 이상했다. 방금 분명히 식탁 정중앙에 놓아둔 스마트폰이, 어느새 식탁 가장자리로 옮겨져 있었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내가 또 건드렸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었다. 한 손으로는 폰을 잡고 있었고, 다른 손은 턱을 괴고 있었으니까. 그는 다시 폰을 중앙에 놓았다.
“젠장, 피곤해서 별생각을 다 하네.”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피곤하면 괜히 예민해지고 환각까지 보는 모양이었다.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폰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역시 내가 너무 지쳐서 그랬을 거야.
보글보글, 냄비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제법 커졌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라면을 꺼냈다. 라면 봉지를 뜯어 조심스럽게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을 덮었다. 3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 부엌 찬장에서 ‘덜그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움찔했다. 찬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분명 소리는 안에서 나는 것이었다.
“누구세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704호는 현우 혼자 사는 원룸이었다. 문도 잠겨 있었다. 설마 도둑인가? 현우는 벽에 기대어 있던 우산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시 ‘덜그럭!’ 이번에는 소리가 더 명확했다. 접시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였다. 현우는 찬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우산을 든 손에 땀이 흥건했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찬장 안은 가지런했다. 가지런히 쌓인 접시들, 컵들. 아무것도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구석구석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 피곤해서 이젠 환청까지 들려?”
현우는 맥이 빠져 우산을 내려놓았다.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그는 컵라면 뚜껑을 열고 면을 휘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막 식탁에 앉으려는데, 그가 방금 앉았던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뒤로 반 뼨 정도 밀려났다. 현우는 얼어붙었다. 컵라면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뭐… 뭐야?”
현우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의자는 마치 누군가 앉았다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놓여 있었다. 그는 의자에 손을 대보았다. 차가웠다. 아무도 없었다.
그때, 거실 한편에 놓인 TV가 갑자기 ‘띠링!’ 소리를 내며 저절로 켜졌다.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TV 화면에서는 난데없이 홈쇼핑 채널이 번쩍였다. 현우는 리모컨을 찾았지만, 리모컨은 소파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TV 채널은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듯 제멋대로 바뀌었다. 홈쇼핑에서 뉴스 채널로, 뉴스 채널에서 드라마 채널로, 다시 버라이어티 쇼로. 화면은 빠르게 깜빡였다.
“이봐! 이거 고장 났어?!”
현우는 소리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며칠 전 보일러를 켜느라 잠깐 온돌 바닥을 만졌을 때의 그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발바닥부터 서늘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현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급하게 집어 들었다. 112를 누르려는데, 손 안의 폰이 ‘툭’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
“안 돼…!”
그가 주저앉아 폰을 집어 들려는 순간, 거실 벽에 걸려 있던 대형 액자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액자 속 풍경화는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 사이로 처참하게 흩어져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보았다. 못은 박혀 있었지만, 액자 걸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거실 한가운데,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투명한 아지랑이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_”…나가…”_
목소리는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현우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그의 심장은 마치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앞의 아지랑이는 점차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문처럼 보였다.
704호 아파트는 더 이상 현우에게 안전한 집이 아니었다. 그의 편안했던 보금자리는, 이제 차갑고 낯선 미지의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