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티격태격 로맨스
지아는 늘 그랬듯,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겨우 숟가락을 놓았다. 방은 흡사 고고학 연구실의 발굴 현장을 방불케 했다. 컵라면 용기 옆에는 빛바랜 고서가, 그 옆에는 미처 펼치다 만 고지도 조각이 너덜거렸다. 침대 맡에는 잠옷 대신 작업복이 던져져 있었고, 이 모든 난장판의 중심에는 그녀, 강지아가 있었다.
“젠장, 이것만 찾으면 되는 건데…!”
지아는 눈을 비비며 컴퓨터 화면 속 고대 문자를 해독하려 애썼다. 석사 논문 주제는 ‘서울 지하에 잠든 미지의 고대 문명 재조명’.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논문을 코웃음 쳤다. 현실성 없는 망상이라며, 학계의 이단아 취급을 했다. 그녀의 통장 잔고만큼이나 암울한 현실이었다.
“아니, 고대인들이 굳이 지하에 도시를 건설할 이유가 없대. 그럼 저기 광화문 지하 삼십 미터에서 발견된 건 그럼 대체 뭔데! 바위가 스스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변했냐고!”
억울함에 그녀는 작은 방 안을 씩씩거리며 돌아다녔다. 벽에는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복잡한 유적 추정도가 잔뜩 붙어 있었다. 지아는 그중 가장 오래된 듯한, 잉크가 번진 종이 조각 하나를 떼어냈다.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들 중 하나였다. 거의 다 해독했지만, 딱 한 구절이 문제였다.
*‘…태양의 그림자가 가장 길어지는 날, 두 개의 달이 겹쳐지는 곳에서 비로소 문이 열리리라.’*
“두 개의 달이 겹쳐지는 곳이라니. 이건 뭐,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아무리 고대 상징이라지만 도통 감이 안 오잖아.”
머리를 쥐어뜯던 지아의 눈이 문득 책상 한쪽에 놓인 낡은 탁상 달력에 꽂혔다. 오늘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하지(夏至)’.
태양이 가장 길어지는 날.
“설마… 그 두 개의 달이라는 게, 그림자를 뜻하는 건가?”
지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고대인들이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 중에는 그림자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두 개의 달’이란,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특정 형상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가장 오래된 점퍼를 걸쳐 입었다. 이성이 비명을 질렀지만, 오랜 시간 억눌렸던 학구열과 모험심이 그녀를 재촉했다. 지아는 낡은 배낭에 손전등과 작은 곡괭이를 쑤셔 넣었다.
***
아침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시각, 지아는 지도에 표시된 장소에 도착했다. 도심 외곽의 버려진 공터. 한때는 작은 공원이었지만, 지금은 무성한 잡초와 깨진 조각상들만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낡은 철문은 녹슬어 삐걱거렸고, 그 안쪽으로는 거대한 담쟁이덩굴이 건물 잔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런 폐허 속에… 정말 뭐가 있을까?”
지아는 혹시 모를 기대감과 실망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가 남긴 지도에는 이끼 낀 돌탑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잡초를 헤치고 지도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헤매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담쟁이덩굴에 뒤덮여 간신히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오래된 돌탑이었다.
“찾았다…!”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다. 그녀는 돌탑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지도에 표시된 지점은 돌탑의 북서쪽이었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풀을 헤치고 돌들을 밀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낡은 돌문 같은 것을 발견했다. 희미한 틈새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와… 대박…”
그녀는 주저앉아 돌문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마모된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흥분으로 손이 떨렸다. 이건 단순한 돌문이 아니었다. 분명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입구였다.
지아는 허리에 찬 작은 곡괭이를 꺼내 들었다. 돌문 틈새에 곡괭이 끝을 끼워 넣고 힘껏 밀어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젠장, 고대인들은 얼마나 튼튼하게 만든 거야!”
한 번 더, 온 힘을 다해 곡괭이를 비틀었을 때였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돌문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순간,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그런 해괴한 망상에 빠져 있습니까, 강지아 씨?”
지아는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그곳에는 말끔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만한 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 그의 손에는 어쩐지 지아의 것보다 훨씬 더 전문적으로 보이는 탐사 장비가 들려 있었다.
“류… 류진 선배?”
류진. 명문대 고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신입생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각종 발굴 현장을 휩쓸었던, 지아와는 악연으로 얽힌 선배였다. 몇 년 전, 지아의 석사 논문 발표회장에서 그녀의 이론을 공개적으로 비웃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류진은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
“여전히 이런 고물상 같은 폐허를 뒤지고 다니는군요. 대체 뭘 기대하고?”
“선배가 여긴 왜…! 설마 제 뒤를 밟은 거예요?” 지아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뒤를 밟다뇨? 어이가 없군. 이 지역은 원래 제가 오래전부터 연구하던 곳입니다. 오히려 당신이 제 구역을 침범한 것 같은데요.”
류진은 지아의 발밑에 있는 돌문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다시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이런 식의 아마추어적인 접근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그저 돌덩이에 불과한데, 또 헛고생하는군요.”
“헛고생이라뇨! 이건 분명히…!” 지아가 반박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돌탑 위에서 굴러떨어진 작은 돌멩이들이 지아의 발밑으로 굴러왔다. 류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진인가?”
흔들림은 점점 더 강해졌다. 돌탑 주변의 흙이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담쟁이덩굴이 뿌리째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아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류진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여기 위험합니다! 떨어져요!”
그의 손아귀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그가 그녀를 끌어당기는 순간, 지아의 발이 미끄러졌다. 그녀가 쓰러지면서 휘두른 곡괭이가 공중에서 번쩍, 돌문의 틈새에 정확히 박혔다.
콰앙!
굉음과 함께 돌문이 안쪽으로 거칠게 밀려 들어갔다. 틈새로 거대한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땅의 흔들림이 멈췄다. 모든 것이 정지했다.
지아와 류진은 흙먼지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의 손은 여전히 얽혀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그들의 눈앞에는 어두컴컴한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 시간 잊혔던, 고대 유적의 입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에…” 지아의 입에서 넋 나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류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어둠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오만한 미소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수천 년의 비밀을 품고, 그들을 새로운 모험의 시작으로 이끄는, 미지의 속삭임이었다.
지아는 류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선배… 우리, 해낸 것 같아요.”
류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피식 웃었다.
“글쎄요. 이제부터가 진짜 골치 아픈 시작일 것 같은데요, 강지아 씨.”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 그들의 발걸음은 잊혀진 고대 문명의 심장부로 향하고 있었다. 티격태격 로맨스의 서막이, 폐허 속에서 막 열린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