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노을이 핏물처럼 지평선을 물들이는 시간. 지훈은 익숙하게 망가진 아파트 단지의 틈새를 기어 다니며 먹거리를 찾았다. 손에 쥔 것은 먼지 쌓인 통조림 두어 개와, 운 좋게 발견한, 아직 완전히 썩지 않은 감자 몇 알. 낡은 배낭은 그 흔한 통조림 깡통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 삐걱거렸다. 멸망 이후의 세계는 소리에 극도로 예민했다. 작은 쇳소리 하나가 생과 사를 가를 수 있었다.
그의 보금자리는 낡은 12층 아파트의 702호였다. 한때는 세 가족이 북적였을 공간은 이제 지훈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창문은 깨지고 틈새로 황량한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외부의 위협으로부터는 나름의 안식처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철문은 녹슬어 삐걱거렸고, 닫을 때마다 귀를 찢는 비명을 질러댔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잠그고 낡은 식탁 위에 오늘 얻은 전리품들을 내려놓았다. 축축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이제 익숙했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 통조림을 따기 위해 깡통따개를 찾았다.
“젠장, 어디 갔지?”
항상 같은 자리에 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도 분명 이곳에 두었는데. 설마 잃어버렸을 리는 없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가 생존에 치명적일 수 있었다. 한참을 헤매다 결국 침대 밑 구석에서 깡통따개를 찾아냈다.
“하… 이젠 건망증까지 왔나.”
스스로를 탓하며 그는 웃었다. 웃음소리가 텅 빈 아파트에 메아리쳤다. 섬뜩하리만치 공허한 소리였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창밖에서는 바람 소리만 으르렁거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때,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건조한 소리였다. 마치 작은 돌멩이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아니면… 뭔가 깨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훈은 벌떡 일어났다. 손에 든 쇠파이프를 꽉 쥐었다.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 소리뿐. 긴장이 풀린 어깨를 내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마도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바람에 날려 부딪힌 소리였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며칠째 먹던 딱딱한 건빵을 물에 불려 먹으려는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건빵 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분명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봉지였다.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쇠파이프를 움켜쥐고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격렬하게 울렸다. 부엌에 들어서자, 깨진 유리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어제 물을 마시기 위해 사용했던 컵이었다. 컵은 마치 누군가 집어 던진 것처럼 산산조각 나 있었다.
“누구야…!?”
그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텅 빈 부엌에는 깨진 유리조각들과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흘러내렸다. 이건 더 이상 바람이나 건물의 노후화가 아니었다. 명백히 무언가, 혹은 누군가 그곳에 있었다.
그날 이후, 기이한 일들은 더욱 빈번해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찢어진 가족 사진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거나, 누군가 고의로 뒤집어 놓은 듯한 책들이 발견되었다. 밤이 되면 정체 모를 속삭임이 벽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마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중얼거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때로는 그의 이름이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훈… 지훈…’
지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 꺼진 아파트에서 그는 홀로 공포와 싸웠다. 그는 쇠파이프를 든 채로 밤새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에 미칠 것 같았다.
“당장 나와! 대체… 정체가 뭐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의 등 뒤에서 작은 액자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액자 속에는 이제는 희미해진, 행복했던 시절의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아내와 딸이 웃고 있었다.
액자는 정확히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마치 그가 사진을 볼 수 있도록 의도한 듯이. 지훈은 액자를 주웠다.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사진을 보려는데, 사진 속 아내와 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웃음 짓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가고,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악!”
그는 액자를 집어 던졌다. 액자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명백히, 그 존재는 그의 눈앞에서 기괴한 현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모든 물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의 컵이 공중으로 솟구치고, 의자가 저절로 뒤로 밀려났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가 뱅글뱅글 돌더니, 시침과 분침이 기이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벽 3시를 가리키던 시계가 눈 깜짝할 새에 5시, 7시, 11시… 다시 3시로 돌아왔다.
쿵! 쿵! 쿵!
안방 쪽에서 거대한 망치로 벽을 내리치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지훈은 그 소리에 귀를 막았다.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천장의 먼지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나가! 나가라고!”
그는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굉음에 묻혔다. 안방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가 그의 사지를 마비시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희미하게,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키는 지훈보다 약간 작고, 왜곡된 그림자처럼 흐릿했다. 그 형체가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없었지만, 지훈은 그 형체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림자 같은 형체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무언가가 바닥을 스치는 듯한, 섬뜩한 마찰음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거실의 모든 물건들이 일제히 지훈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의자, 컵, 책, 심지어 찢어진 가족사진 조각까지.
지훈은 쇠파이프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날아오는 물건들을 피하며 그는 몸을 웅크렸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싸늘한 숨결이 느껴졌다.
“……지훈.”
그의 이름이 들렸다. 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공허하며, 수만 개의 영혼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기괴한 울림이 담긴 목소리였다. 마치 그의 내면에서부터 솟아난 듯한, 가장 깊은 곳의 공포를 긁어내는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차마 돌릴 수 없었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심장은 찢어질 듯 아팠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너를… 지켜줄게.”
다시금 그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인간의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얼음장 같은 감각. 그 손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안 돼…!”
지훈은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에서 피부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워지면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그 손을 뿌리치고 거실 한구석으로 몸을 던졌다.
그림자 형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형체의 존재감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지훈은 헐떡이며 숨을 쉬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에게 지옥보다 더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가 의지했던 유일한 안식처가, 이제 그를 잡아먹으려는 괴물의 심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난… 난 여기서 나갈 거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림자 형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문을 향해 한 발짝 내딛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굳게 닫혔다.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가 잠겼다. 외부로 향하는 유일한 탈출구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702호는 이제 완벽한 감옥이 되었다. 바깥세상보다 더 위험하고, 더 잔혹한 공포가 도사리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지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들이 맴돌고 있었다. 그 속삭임 속에는 그의 이름이, 그의 목소리가, 그리고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닌, 기괴하게 변질된 기억들이 섞여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아파트에서,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