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는 소나무 향과 다른 어떤 것, 늘 월영림에 짙게 배어 있는 차고 축축한 흙 내음으로 가득했다. 강하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인간의 땅, 아르카디아 왕국 최북단 경비대 막사에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이었지만, 이곳은 언제나 다른 세계의 문턱처럼 느껴졌다. 달빛이 숲의 앙상한 가지들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보름을 갓 넘긴 달이었다. 그의 낡은 군복은 밤이슬에 눅눅했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묵직한 돌로 지어진 ‘장벽’이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간과 월영족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는 거대한 상처. 수백 년의 증오와 오해가 켜켜이 쌓인 경계선이었다. 장벽 위로는 보초병들이 번갈아 순찰을 돌았고, 멀리서 들려오는 마물의 울음소리가 가끔 정적을 깨뜨렸다. 하지만 하준의 귀는 그 모든 소음을 넘어,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미약한 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발소리도 아니었고,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어떤 파동, 존재의 증명과 같은 미세한 떨림이었다. 하준은 품속에서 작은 은제 단검을 꺼내 쥐었다. 날카로운 냉기가 손가락에 스며들었다. 월영족과의 접촉은 언제나 금지된 일이었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국가 반역죄, 종족의 순수성을 더럽힌 죄. 그 대가는 죽음뿐이었다.
그러나 하준은, 그의 심장은 이미 수십 번도 더 이 경계를 넘어선 참이었다.
수풀이 조용히 흔들렸다. 밤바람이 아닌, 누군가의 움직임으로 인한 떨림이었다. 그의 눈앞에,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오듯 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얇은 귀 끝이 살짝 떨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실레나였다. 월영족. 하준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하준.”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에 그의 심장이 한 번 크게 울렸다. 그 어떤 전장의 포효보다도, 그 어떤 승리의 함성보다도, 이 작은 목소리가 그를 더 깊이 뒤흔들었다.
“실레나.”
그는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가 갈라질까 두려워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숲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끼 낀 돌 위에서 피어난 꽃처럼 연약하면서도, 동시에 뿌리 깊은 고목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녀의 옷은 숲의 색을 닮은 짙은 초록색이었고, 목에는 숲의 영물이 준다는 작은 수정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하준에게 다가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손이 그의 거친 손을 감싸자, 온몸에 미세한 전율이 흘렀다. 그들의 손은 너무나 달랐다. 인간의 투박하고 굳은살 박힌 손, 그리고 숲의 정령처럼 섬세하고 차가운 손. 하지만 그 온도의 대비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더욱 강렬하게 느꼈다.
“별일 없었나요?” 실레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의 눈은 깊은 밤하늘의 색을 닮아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늘 하준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다.
“그럼. 늘 똑같은 일상이지. 순찰, 보고, 그리고 너를 기다리는 시간.” 하준은 애써 경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실레나는 그의 어조 뒤에 숨겨진 피로와 불안을 읽어냈다. 그녀는 월영족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인간이 감추려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까지도 감지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 숲에 인간 순찰대가 더 깊이 들어왔어요.” 실레나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숲의 경계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어요. 당신들 병사들의 발자국이, 나무들의 비명을 지르게 해요.”
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부에서 새로운 영지를 개척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월영족의 숲을 침범하려 할 줄은 몰랐군.”
“침범이에요. 이미 수많은 나무가 베어졌고, 숲의 동료들이 다쳤어요. 그들은 우리의 사냥터를, 우리의 터전을 빼앗고 있어요.” 실레나의 목소리에 슬픔과 함께 희미한 분노가 서렸다. 월영족에게 숲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생명이자 영혼 그 자체였다.
“미안하다.” 하준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인간이었고, 이 모든 일의 일부분이었다. 이 장벽을 지키는 존재였다. 동시에, 이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실레나는 하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하준. 나는 당신이 우리 숲을, 우리 종족을 존중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더 아파요. 당신의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는 게.”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금지된 눈빛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년간 서로를 적으로만 보아온 두 종족의 구성원이, 달빛 아래에서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
“실레나, 나는… 방법을 찾을 거야.” 하준이 나직이 말했다. “이 모든 어리석은 증오를 끝낼 방법을.”
실레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도 알잖아요. 숲의 장로들은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욕망에 눈이 멀어 자연을 파괴하고, 다른 존재를 지배하려 든다고.”
“인간은 모두 그렇지 않아!” 하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인간이야. 나는 너를… 너희를 이해하고 싶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그 순간, 숲 저편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쨍그랑!’ 낡은 돌멩이가 경사면을 굴러 내려가는 소리였다. 이어지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하준의 몸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누구지?”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실레나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예민한 귀를 쫑긋 세우고 숲의 소리에 집중했다.
“인간… 병사들 같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둘… 아니, 셋.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하준의 심장이 발이 묶인 듯 얼어붙었다. 이 시간에 이곳까지 올 인간 병사는 없었다. 이곳은 그의 순찰 구역이었고, 다른 병사들이 알 리 없는 비밀 장소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를 미행했거나, 아니면… 더 큰 음모의 일부일 수도 있었다.
“실레나, 숨어!” 하준이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빨리! 내가 처리할게!”
실레나는 한순간 망설였다. 그의 뒤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녀의 월영족 본능이 위험을 감지했다. 그녀가 여기에 있다가 발각되면, 하준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조심해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재빠르게 숲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모습은 그림자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거기 누구냐!”
장벽 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하준의 소대원이었다. 그들은 왜 여기에? 하준은 단검을 다시 품에 넣고,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태연하게 자세를 잡았다.
“접니다, 상병님! 강하준입니다!” 그는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하며, 병사들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숲속을 더듬어 나오는 세 명의 병사가 그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멈춰 섰다.
“하준 상병님? 여기서 뭘 하십니까?” 선두에 선 병사의 얼굴에 의심의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하준의 소대장이자 평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한스였다. 덩치 크고 거친 외모의 한스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하준과 주위를 번갈아 살폈다.
“밤 공기가 좋아서 잠시 산책을 나왔습니다. 특별한 동향은 없습니다, 한스 소대장님.” 하준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한스가 경계를 향해 좁아지는 눈을 놓치지 않았다. 실레나의 흔적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밤 공기가 좋아서? 하하. 상병님도 참. 여기는 위험한 경계 구역입니다. 게다가… 방금 숲에서 뭔가 튀어나가는 걸 본 것 같은데 말이죠. 혹시… 월영족이라도 만난 겁니까?” 한스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비난과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하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한스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그들이 실레나를, 혹은 실레나가 사라지는 것을 본 것일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소대장님. 밤에 순찰을 돌다가 멧돼지라도 봤겠지요. 월영족은 감히 장벽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소대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준은 최대한 침착하게 반박했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에 감춰진 작은 단검에 닿아 있었다. 만약 그들이 실레나를 발견했다면… 그는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그렇습니까. 멧돼지라. 그런데 상병님, 멧돼지는 은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텐데요. 방금 제가 분명히 봤습니다. 은빛 섬광 같은 것이 숲 속으로 사라지는 걸.”
하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보았다. 실레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땀방울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숲속은 여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실레나가 과연 무사히 더 깊은 곳으로 숨었을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을 죽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 그건…!” 하준이 변명하려 했지만, 한스는 그의 말을 끊었다.
“상병님. 설마 경고를 잊으신 건 아니겠죠? 월영족과의 접촉은… 사형이라는 것을.” 한스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게다가 당신은… 과거에도 그런 소문이 있었죠. 숲을 너무 자주 들여다본다는 소문이.”
상황은 최악이었다. 하준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한스와 병사들을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자신은 월영족과 내통한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실레나의 존재는 더욱 위험해질 터였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어떻게 실레나를 보호해야 할까? 그의 눈은 숲의 깊은 어둠 속을 갈망하듯 응시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고, 그곳에 그의 희망이 있었다. 동시에, 그곳에 그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한스의 차가운 시선이 그의 등 뒤, 실레나가 사라진 숲의 방향으로 향했다.
“수색해!” 한스가 짧게 명령했다. “저쪽 숲을 샅샅이 뒤져. 뭔가 수상한 게 분명해.”
두 명의 병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숲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하준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실레나가 잡힐 수도 있다. 그의 손이 단검의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아르카디아 왕국의 충실한 병사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려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제 모든 것은 하준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칼을 뽑을 것인가, 아니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