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스름이 짙게 깔린 망각의 사원. 한때 고귀한 신을 모셨다는 전설조차 빛바랜 채, 이제는 저급 몬스터들과 잡동사니를 찾아 헤매는 하급 모험가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폐허였다. 그 폐허의 한 귀퉁이, 벽에 기대어 흐읍, 하고 길게 숨을 내쉬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리아르였다.

“젠장, 오늘도 이건가.”

리아르는 손에 든 낡은 단검을 휙휙 휘둘러 거미줄을 걷어냈다. 등 뒤에서는 방금 처리한 으스스한 구울의 시체가 먼지가 되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별 볼 일 없는 마석 하나, 그리고 닳아빠진 동전 몇 닢이 오늘의 수확 전부였다. 이세계에 전생한 지 어언 3년. 게임에서나 보던 스킬이니 마법이니 하는 것들을 직접 익히고 사용하게 되었지만, 그 실상은 비참할 정도로 평범했다. 불꽃이나 마법 화살 같은 기초 마법은 그저 간신히 쓸 수 있는 수준이었고, 검술은 또래 모험가들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 주식이나 좀 해둘걸 그랬나.’

농담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생의 기억이 흐릿해진 지 오래였지만, 그때의 자신은 적어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는 않았다. 숨 막히는 회사 생활에 찌들었을지언정, 적어도 구울 따위와 칼부림을 하는 일은 없었다.

리아르는 투덜거리며 무너져 내린 벽을 따라 걸었다. 미로 같은 사원의 구조는 항상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한때는 장엄했을 회랑은 이제 깨진 돌조각과 습한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지독하게 답답한 공기,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곰팡이 냄새가 그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텐데….”

그는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그의 발이 미끄러졌다. 낡은 돌조각에 걸려 휘청거리던 몸이 벽을 향해 그대로 고꾸라졌다.

—쿠당탕!

“아야야…”

엉덩방아를 찧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벽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었는지, 그의 등과 부딪히며 ‘뿌드득’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랍게도 벽의 한 부분이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어…?”

그가 자세를 바로잡고 보니, 그의 등에 닿았던 벽면이 마치 숨겨진 문처럼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틈새로 보이는 것은 빛이라기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어둠이었다. 보통의 어둠과는 다른, 마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밀도 높은 검은색이었다.

리아르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안에서 솟아나는 강렬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 폐허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이야. 모험가 길드의 탐사 기록에도, 사원에 대한 어떤 전설에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갈망에 가까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밑에서 ‘사그락’ 하는 마른 소리가 났다. 켜켜이 쌓인 먼지였다. 발자국조차 없는 이 공간은, 리아르가 최초의 방문객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내부의 공기는 바깥과는 확연히 달랐다. 습한 기운이 사라지고, 마치 오래된 서고에 들어온 듯한 묘한 건조함과 정적이 감돌았다. 손에 든 마석 등불을 높이 들자, 좁은 통로가 이어지고 이내 작은 원형의 방이 나타났다.

방 중앙에는 직경 2미터쯤 되는 거대한 석판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검은색 화강암 재질의 석판 위로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상형문자와 같기도 했고, 복잡한 마법진의 일부 같기도 했다. 등불의 빛이 닿자, 석판의 문양들이 아주 희미하게 푸른빛을 머금는 듯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심해의 생명체처럼,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리아르는 석판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문양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이해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석판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것은 단순히 마력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원초적이고 거대한 무언가였다. 마치 세상의 근원이 응축되어 있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이건… 그냥 장식물이 아니잖아.”

그는 홀린 듯 석판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검은 석판의 차가운 표면에 닿는 순간,

—콰아아앙!

정적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석판의 문양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푸른빛을 뿜어내며 빛났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푸른 광채는 리아르의 그림자를 집어삼키고, 그를 삼킬 듯이 휘감았다.

“흐윽!”

전신으로 파고드는 엄청난 충격에 리아르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그의 몸 안의 모든 마력이 격렬하게 요동쳤고, 마치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 그의 의식은 저항할 새도 없이 뒤흔들렸다. 눈앞이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었고, 귀에는 수천수만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이것은… 기억… 과거… 근원…

의식의 심연에서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모든 존재의 시작, 모든 마법의 흐름, 세계를 구성하는 원초적인 힘의 파동이 그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거대한 강의 원천이 흐름을 바꾸어 그의 작은 존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으어어…!”

리아르는 무릎을 꿇었다.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폭풍에 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의 육체는 이 거대한 힘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나약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엄청난 희열이 솟아났다. 그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순수한 마법의 정수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몸속을 흐르는 마력 회로가 새로운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확장되고 재구성되는 것이 느껴졌다.

푸른빛이 최고조에 달했다. 방의 벽면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고, 천장에서는 마치 별빛이 쏟아지는 듯한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리아르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마력의 폭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 세계의 과거와 미래, 모든 비밀이 담긴 지식의 문이 열리는 순간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푸른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방은 다시 원래의 어둠과 정적으로 돌아왔다. 석판의 문양들도 다시 희미한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리아르는 변해 있었다.

그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호흡은 격렬했다. 심장은 아직도 격렬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떨리는 손바닥을 바라봤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평범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아니, 모든 것이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약한 마력의 흐름을 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마치 눈앞에 보이지 않던 색깔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원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력의 잔재, 그리고 방금 자신이 접촉했던 석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에너지가 그의 의식 속으로 생생하게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 감지 능력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악보를 읽어내듯이, 세상의 모든 마법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다.

리아르는 천천히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아주 희미하게 피어났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기초 마법의 빛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더 깊고 원초적인 빛이었다.

“이게… 대체….”

그의 머릿속에, 방금 석판을 통해 흘러들어 온 엄청난 양의 정보와 감각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특정 스킬이나 주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법 그 자체의 본질, 근원을 이해하는 듯한 깨달음이었다.

리아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려움과 경외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흥분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엇과 연결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문득, 사원 바깥쪽에서 ‘크르르릉’ 하는 낮게 울리는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는 그저 저급 몬스터의 소음으로 들렸을 그 소리 안에 담긴 미약한 마력의 파동이, 이제는 그의 의식 속으로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그것은 단순한 짐승의 울음이 아니라, 마력을 끌어모아 포효하는 한 마리 맹수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리아르는 숨을 삼켰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이 손으로, 그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고대의 마법이 그의 손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