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도시를 지훈은 묵묵히 걸었다. 그의 등에는 낡았지만 길들여진 배낭이 얹혀 있었고, 한쪽 어깨에는 녹슨 사냥총이 걸려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폐부를 긁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몇 년 동안이나 이어진 추격. 마침내, 그 끈질긴 그림자의 끝이 눈앞에 다가왔다.
수십 번은 죽었을 이 황량한 세상에서, 지훈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아남았다. 민준. 그 이름 석 자는 심장을 갉아먹는 독이자, 동시에 그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폐허가 된 공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기형적인 손가락처럼 하늘을 할퀴는 곳을 지나자,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듯한 상점가가 나타났다. 다른 생존자 집단이 여기를 점거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에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 중심에, 민준이 있었다. 쓰레기 더미와 부서진 차량들이 바리케이드처럼 쌓여 있었고, 불규칙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누군가 불을 피웠다는 증거였다.
지훈은 낡은 상점 안으로 몸을 숨기고 창문 틈으로 안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찾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깔끔한 차림새,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 민준은 몇 명의 무리를 이끌고 바리케이드 너머를 살피고 있었다. 등에 맨 소총이 이질적인 번쩍임을 띠었다.
지훈의 손에 든 사냥총이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다. 놈을 바로 쏴 죽이는 건 너무 쉬운 복수다. 그에게도, 서연에게도. 지훈은 이를 갈았다.
밤이 찾아왔다. 어둠은 지훈의 오랜 친구였다. 그는 바리케이드를 넘어, 가장 경계가 허술한 뒷골목을 택했다. ‘그것들’의 울부짖음이 멀리서 들려왔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제법 익숙하게 그것들을 무시하는 듯했다. 민준의 거처는 상점가에서 가장 큰 3층 건물이었다. 꽤 튼튼하게 보수된 창문과 문은 안일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지훈은 건물 뒤편의 깨진 벽돌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내부에는 희미한 램프 불빛이 새어 나왔고, 고기 굽는 냄새가 비릿하게 퍼졌다. 민준은 이곳에서 왕처럼 지내고 있겠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조용히 올랐다. 그의 심장은 북을 치듯 격렬하게 울렸다. 복도가 보였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 지훈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지 않았다. 안일함, 방심. 그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였다.
덜컹, 문이 열리고 지훈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램프 불빛에 의지해 탁자에 앉아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던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인 당혹감과 경계심이 스쳤다.
“누구… 읍!”
민준이 소리치려던 순간, 지훈은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민준의 목에 닿았다. 녹슨 칼날이 빛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움직이면, 진짜 죽어.” 지훈의 목소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낮고 거칠었다.
민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이내 그의 시선이 지훈의 얼굴에 닿았고,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지… 지훈? 설마… 네가 어떻게…?”
지훈은 민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민준의 목에 칼날이 더욱 세게 파고들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해? 궁금하면 그때, 너한테 버려졌던 폐병원 옥상에서 기다렸어야지. 씨발, 너처럼 도망치지 않고.”
민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권총을 훔쳐보려 했지만, 지훈은 이미 그것을 발로 차 벽으로 날려버렸다.
“서연이는… 서연이는 어떻게 됐냐고 묻고 싶지 않아?” 지훈의 눈빛은 칼날보다 더 차가웠다.
그 말에 민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워낙 많았잖아, 것들이… 나라도 살아야….”
“살아? 그래, 너는 살았지. 뻔뻔하게 살아남아서 이렇게 잘 먹고 잘살고 있었어.”
지훈은 칼을 더욱 깊게 밀어 넣었다. 민준의 목에서 핏줄이 울컥 튀어나올 것 같았다.
“기억 안 나? 서연이가, 너 도망칠 시간 벌어주려고, 옥상 문 막으려다가… 결국 놈들에게….”
지훈의 목소리에 진한 고통과 분노가 섞였다. 민준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난 그때 숨어있었어. 서연이가 나보고 숨으라고, 너까지 죽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든. 네가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면서, 서연이가 놈들에게 찢겨 죽는 걸 보면서… 난 살았어. 너를 죽이려고.”
민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도망친 이후로, 한시도 편히 잠든 적이 없어. 매일 밤 서연이의 비명과 네 비겁한 뒷모습이 내 꿈에 나왔어. 내가 살아있는 지옥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넌 여기서 왕처럼 지냈겠지.”
“제… 제발… 지훈아… 우리가 그래도 친구였잖아… 응? 다 과거의 일이야… 이제 우리… 다시 함께…” 민준이 애원하듯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지훈은 냉소를 터뜨렸다. “친구? 개소리 하지 마. 넌 친구를 버린 게 아니라, 네 목숨값을 치르라고 친구를 내던진 거야.”
그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 민준의 눈에 희망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도와…!”
민준이 외치려던 찰나, 지훈의 손이 민준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퍽 소리와 함께 민준의 고개가 꺾였다. 그 틈에 지훈은 칼날을 민준의 목에서 떼어내고, 재빨리 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쿵,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지훈은 민준의 입을 틀어막고, 그의 목에 칼날을 들이댄 채 문을 등지고 섰다.
“민준 대장님, 안에서 무슨 일 있습니까?”
지훈은 민준의 귀에 속삭였다. “아무 말 하지 마. 아니면, 지금 여기서 네 피를 뿌릴 거야.”
민준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시… 잠시 쉬고 있으니까 신경 끄고 돌아가!”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밖의 발소리가 머뭇거리더니, 이내 멀어지는 듯했다.
지훈은 민준의 머리채를 놓지 않았다. 그는 민준을 방 한가운데로 끌고 가, 램프 불빛 아래에 던졌다. 민준은 바닥에 나뒹굴며 콜록거렸다.
“날 죽일 거면… 빨리 죽여…” 민준이 헐떡이며 말했다.
“죽인다고? 아니. 그렇게 쉽게는 못 죽지.”
지훈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눈은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다.
“서연이가 그랬어. 마지막 순간에, 널 살려달라고 나한테 빌었어. 근데 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대신 너를 놈들에게 보내줄게.”
지훈은 민준의 팔을 잡고 거칠게 끌었다.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지훈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지훈은 민준의 방에 있던 밧줄을 찾아 그의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입까지 재갈을 물렸다.
“으읍! 으읍읍!” 민준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네가 여기서 왕 대접을 받고 살았으면, 네 백성들에게 네 마지막을 보여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지훈은 묶인 민준을 끌고 복도로 나섰다. 램프 불빛이 비치는 복도 끝에 창문이 보였다. 그 창문 밖은 상점가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그것들’의 울부짖음. 지훈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처럼, 옥상 문을 막을 사람은 없어. 이번엔 네가 버려지는 거야.”
지훈은 밧줄로 민준을 매달았다. 창문 밖으로, 상점가 한가운데를 향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민준의 눈이 공포로 미친 듯이 커졌다. 그는 몸을 비틀며 발버둥 쳤지만, 밧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가 서연이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게. 너는 ‘그것들’에게 버려질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 마지막 순간을 놈들 앞에서 맞이해봐.”
민준의 절규가 재갈에 막혀 억눌린 소리가 되었다. 그의 몸은 지상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놈들의 울부짖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한 움직임들이 감지되었다.
지훈은 민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민준의 얼굴에서, 그는 과거의 친구를 보지 못했다. 오직 혐오스러운 배신자만을 보았다.
“잘 가라, 민준. 이건 서연이 몫이다.”
지훈은 밧줄을 끊는 대신, 칼로 민준의 몸에 연결된 밧줄 매듭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민준의 무게로 밧줄이 풀리며 그가 한 뼘 한 뼘 지상으로 내려가게 만들었다. 놈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민준은 재갈 속에서 미친 듯이 절규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밧줄은 더 빠르게 풀렸다. 지면 가까이, ‘그것들’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놈들의 손이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
마침내, 민준의 발이 지면에 닿기 직전, 밧줄이 완전히 풀렸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는 동시에, 죽음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놈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민준을 덮쳤다. 그의 절규는 피와 살이 찢기는 소리에 묻혔다.
지훈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 장면을 지켜봤다.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아니었다. 그저 먹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텅 빈 감정만이 남았다.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지훈은 창문을 닫았다. 밖의 아수라장은 이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돌아서서,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의 등 뒤로, 민준의 비명은 마침내 영원히 침묵했다.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지훈의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 나아가야 하는 길 위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끝나지 않은, 그러나 한 장이 넘겨진 지옥의 여정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