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졌다. 지평선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고, 붉게 물든 하늘은 마치 피를 토한 상처 같았다. 단호는 고요히 멈춰 서서 노을에 잠긴 풍경을 응시했다. 한때 푸르렀을 들판은 온통 회색빛으로 바래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의 흔적은 이제 형체 없는 폐허에 불과했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것은 흙먼지와 함께 스러져간 생명들의 비명 소리 같았다.
“또 하루가 저무는군.”
나직이 읊조린 목소리는 메마른 바람에 흩어졌다. 단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으나, 그 안에는 켜켜이 쌓인 비통함과 지독한 피로가 서려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목검이 매달려 있었고,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가벼운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도포는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여전히 고수의 풍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저 멀리, 검은 산맥을 등지고 우뚝 솟은 거대한 석탑, ‘천검사(天劍寺)’였다. 한때 무림의 심장이자, 모든 무인이 동경하던 성지였던 곳. 이제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걸린 ‘구원대회(救援大會)’가 열리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몇 달 전, 세상은 지옥으로 변했다. ‘악몽 역병’이라 불리는 기괴한 질병이 창궐했고, 사람들은 이성을 잃은 채 서로를 물어뜯는 ‘역병 시체’가 되었다. 그들은 육신은 썩어 문드러졌으나, 어둠의 기운에 의해 되살아난 듯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무림의 고수들도 초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의 내공과 검강이 역병 시체를 갈랐지만, 그들의 수는 끝이 없었다. 물리면 감염되었고, 감염되면 곧 시체가 되어 아군을 공격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문파들이 하루아침에 멸문하고, 강호의 질서는 무너져 내렸다.
단호는 그 모든 것을 목도했다. 그의 사문 역시 역병 시체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는 살아남았고, 이제는 홀로 남은 이들 중 하나였다.
어둠이 짙어지자, 그는 숲이 우거진 폐허 속으로 몸을 숨겼다. 희미한 달빛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마치 시체의 팔처럼 하늘로 뻗어 있었다. 매복이었다. 후각이 없는 역병 시체들이지만, 소리에 민감하고, 일단 발견하면 끈질기게 쫓아왔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멀리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 짐승의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 곧이어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최소 열 마리 이상이었다. 그들은 이미 썩어 문드러진 몰골이었지만, 불타는 듯한 붉은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는 듯 섬뜩했다.
단호는 나무 위 나뭇가지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역병 시체들은 일정한 패턴 없이 주변을 배회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예측 불가능했으며, 덩치에 비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단호가 숨어있는 나무 아래로 다가왔다. 썩어가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역병 시체에게 후각은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일 뿐.
단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내공은 기척을 완전히 지웠고, 심지어는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극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렸을까. 역병 시체들은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단호는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조용히 나뭇가지에서 내려왔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움직이며, 그는 밤길을 계속했다.
* * *
천검사의 거대한 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단호는 새벽의 여명이 동트는 것을 보았다. 십여 리 밖에서부터 철벽처럼 둘러쳐진 거대한 장벽은 역병 시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이 솟아 있었다. 그 장벽 위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밤샘 경계의 피로가 역력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신분 확인.”
장벽을 지나 거대한 성문 앞에 다다르자, 전신에 검은 갑옷을 입은 무사가 앞을 막아섰다. 그의 갑옷에는 천검사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단호는 품속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보였다. 그의 사문의 고유 문양이 새겨진 패였다. 이제는 폐허가 된 사문의 마지막 증표.
“강호 이매회 소속, 단호. 구원대회 참가 자격이 있소.”
이매회. 한때 강호에서 명망 높았던 문파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단호 외에 생존자가 몇이나 될지 알 수 없었다. 문지기 무사는 단호의 패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동정심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들어오십시오. 많은 분들이 이미 와 계십니다.”
성문을 통과하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바깥세상의 황량함과는 대조적으로, 천검사의 내부는 비록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활기가 넘쳐 흘렀다. 수많은 천막들이 줄지어 있었고, 온갖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다. 낡고 해진 도포를 입은 강호인들, 갑옷을 두른 군인들, 심지어는 평범한 백성들까지, 이 작은 공간에 모여 마치 마지막 피난처를 찾은 듯했다.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에 달하는 무림 고수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사파와 정파, 명문 정파와 듣도 보도 못한 신흥 무림인들까지, 서로 다른 목적과 사연을 가진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함께 팽팽한 기싸움이 느껴졌다. 역병 시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지만, 수십 년간 이어진 문파 간의 해묵은 감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호는 그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미리 할당된 듯한 천막들 사이를 걸어 나아갔다. 그가 배정받은 곳은 가장자리에 위치한 작은 천막이었다. 짐을 풀고 잠시 앉아 눈을 감았다. 긴 여정과 며칠 밤낮 이어진 역병 시체와의 싸움으로 그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천막 밖으로 나와 보니, 천검사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광장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무언가 시작되려 하는 듯했다.
단호도 그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광장 중앙에는 높다란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무림의 원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함께 세상의 무게가 얹혀 있는 듯했다.
특히 중앙에 앉은 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승, ‘천검사’의 방장 ‘혜명 대사’였다. 그의 얼굴은 자비로우면서도 날카로웠고,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깨달음과 함께 무림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혜명 대사가 앞으로 나서자, 광장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두들, 이 혼돈의 시기에 천검사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천하를 덮친 악몽 역병은 이미 온 강산을 집어삼켰고, 우리 인류는 이제 마지막 보루만을 남겨두고 있소.”
그의 목소리는 비록 노쇠했지만, 광장 끝까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감히 말하겠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살아남은 최후의 무림인이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원한과 문파의 영달을 위해 싸울 수 없소. 우리의 싸움은 오직 하나,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하오!”
장내가 술렁거렸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동의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혜명 대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에 천검사는 모든 문파의 합의를 거쳐 ‘구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소. 이 대회는 단순히 개인의 무위를 겨루는 자리가 아니오. 역병 시체의 근원을 찾아내고, 인류를 구원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그리고 그 지휘를 맡을 단 한 명의 ‘구원자’를 뽑기 위한 대회요.”
단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구원자. 무림의 모든 고수들이 인정하고 따를 수 있는 단 한 명의 지도자.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무게의 자리였다.
“우리는 이미 역병 시체의 약점을 파악했소. 그들은 ‘정화의 기운’에 취약하며, 역병의 근원에는 ‘흑마공(黑魔功)’이라는 사악한 기운이 존재함을 알아냈소. 구원자는 이 흑마공의 근원을 찾고, 정화의 기운을 다루어 역병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오.”
갑자기, 단상의 한쪽에서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명 대사, 말씀은 감사하나, 그 ‘흑마공’의 근원을 찾고 정화의 기운을 다루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 줄 아시오? 이 대회는 결국 무력으로 우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겠소? 그럼 결국, 가장 강한 자가 그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말 아닙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검은 도포를 입은 거한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거대한 도(刀)가 매달려 있었고, 얼굴에는 거친 흉터가 가득했다. 사파의 맹주라 불리는 ‘혈랑도(血狼刀) 독무(毒武)’였다. 그는 주변 무림인들의 살벌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혜명 대사를 직시했다.
혜명 대사는 독무를 잠시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혈랑도 독무. 결국은 무력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오. 우리는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이 시점에서,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절대적인 힘과 지혜를 가진 자를 원하오.”
그의 말에 독무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빨리 시작하시지요. 모두가 목숨 걸고 이곳에 온 마당에, 구차한 설명은 집어치우고 누가 가장 강한지 겨뤄봅시다.”
그의 도발적인 말에 정파 쪽에서 험악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혜명 대사는 침착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알겠소.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구려. 내일 새벽, 천검사 후원에서 첫 번째 관문이 시작될 것이오. 각 문파의 대표, 혹은 뛰어난 무위를 가진 자들은 모두 참가할 수 있소. 첫 번째 관문은 바로… ‘백검환(百劍環)’이오.”
백검환. 그 이름을 듣자, 단호를 비롯한 몇몇 고수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백검환은 천검사의 가장 강력한 훈련장이자, 동시에 살아 돌아오는 자가 거의 없는 지옥의 시험장이었다. 역대 천검사의 방장들이 직접 설계한, 수백 개의 검진(劍陣)과 함정으로 이루어진 곳. 과거에는 뛰어난 고수들만이 명예를 걸고 도전했으나, 이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진정한 시험대가 될 터였다.
혜명 대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광장에 울려 퍼졌다.
“명심하시오. 이것은 무림 대회가 아니오. 우리 모두의 마지막 싸움이자, 인류의 운명을 건 구원대회요.”
그 말을 끝으로 혜명 대사는 물러났고, 광장은 이내 웅성거림과 함께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단호는 고요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 모든 혼돈과 절망 속에서,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품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도 잊히지 않을,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켜내야 한다고.
단호는 조용히 발길을 돌려 천막으로 향했다. 내일의 싸움을 위해, 지친 몸과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목검을 스쳤다. 날카로운 검기가 없어도, 그의 검은 언제나 살아있었다. 칼날이 없어도, 벨 수 있는 것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절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