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내 이름은 김수아. 29년 인생을 통틀어, 내 사전에는 언제나 ‘성실’과 ‘인내’, 그리고 ‘착함’이라는 단어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수룩하지만 마음씨 좋은 친구’라고 불렀고,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뿌듯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아주 큰 착각이었다.

내 세상이 산산조각 난 건,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민준과의 5주년 기념일을 맞아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두고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꽃단장까지 마치고 막 현관문을 열었을 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이지현. 나의 15년 지기 ‘절친’.

“수아야, 너 지금 어디야? 혹시… 혹시 지금 민준 오빠랑 같이 있어?”

지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니, 나 지금 민준이 만나러 가는 길인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 순간, 지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너 혹시… 민준 오빠랑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물론 우리는 진지하게 만나고 있고, 언젠가는… 아, 혹시 민준이가 프러포즈 준비하는 거라도 들었어? 지현아, 아무리 절친이라도 이건 스포하면 안 돼!”

나는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지현은 웃지 않았다.

“수아야…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현이 민준이의 서프라이즈 프러포즈 계획을 실수로 발설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지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심장을 완전히 꿰뚫어 버렸다.

“민준 오빠랑… 나, 이번 주말에 결혼해. 어제 프러포즈 받았어. 어쩌지, 너무 급하게 진행돼서 너한테 말할 타이밍을 놓쳤어…”

세상이 멈췄다. 쨍한 햇살 아래,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귓가에서 지현의 말이 메아리쳤다. ‘민준 오빠랑 나, 이번 주말에 결혼해.’ ‘어제 프러포즈 받았어.’

“뭐…라고?” 내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게 갈라졌다.

“수아야, 오해야! 오해라고 말해 줘!”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너 농담이지? 어제 민준이가 나한테… 이번 주말에 중요한 얘기 할 거라고 했어. 5주년 기념으로… 농담하지 마, 지현아.”

지현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수아야. 정말 미안해. 오빠가 너한테 직접 말할 거라고 했는데… 내가 너무 기뻐서 그만… 네게 먼저 알리게 됐네.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해. 어쩔 수 없었어.”

내 두 손에 들린 꽃다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민준이 평소 좋아하던 하늘색 수국이었다. 바스라진 꽃잎처럼 내 마음도 그렇게 부서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성실’, ‘인내’, ‘착함’이라는 단어들은 잿더미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아주 새롭고 날카로운 단어가 박혔다.

‘복수’.

**

그날 이후, 김수아는 죽었다. 대신, ‘복수의 화신’ 김수아가 태어났다.

나는 그날 밤을 꼬박 새워 침대 위에서 오열했다. 베개가 축축하게 젖고 눈은 퉁퉁 부었다. 하지만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내 눈빛은 완전히 달라졌다. 거울 속의 나는 더 이상 어수룩하고 착한 김수아가 아니었다. 불타는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 같았다. 물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지현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수아야… 내가 너무 경솔했어. 어제 전화해서 너무 놀랐지? 정말 미안해. 그런데 오빠가 너한테 미처 말을 못 한 건 오빠도 정말 힘들었기 때문일 거야… 너도 이해해 줘.”

뻔뻔함의 극치였다.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모든 죄를 덮으려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지현아.”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왜 미안해. 난… 난 괜찮아. 솔직히 좀 충격받긴 했지만… 너희 둘이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내가 어떻게 방해할 수 있겠어?”

지현은 내 반응에 조금 놀란 듯했다. “수아야…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다… 역시 넌 착한 친구야.”

‘착한 친구’라니. 속이 뒤집혔지만, 나는 이 악물고 참았다. 그래, 그녀의 오만함을 실컷 이용해 줄 테다.

“그럼! 그럼 당연하지.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 친구 지현이가, 내 남자친구가… 아니, 이제 전 남자친구지… 하여튼! 그 민준 오빠랑 그렇게 사랑한다니, 내가 뭘 더 바라겠어.”

나는 ‘민준 오빠’라는 호칭을 강조하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지현은 안심한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고맙다, 수아야. 역시 내 15년 지기 베프는 너밖에 없어.”

나는 빙긋 웃었다. “그럼! 그러니 내가 너의 결혼식을 누구보다 성대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지현아, 나에게 네 웨딩 플래너를 맡겨줘!”

지현은 잠시 당황한 듯 침묵하더니 이내 기쁜 듯 외쳤다. “정말?! 수아야, 네가 그렇게까지 해준다면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울 것 같아! 네가 그래픽 디자이너잖아? 센스도 좋고, 꼼꼼하니까 분명 최고로 멋진 결혼식을 만들어줄 거야!”

그녀의 순진한 착각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완벽하게 만들어주지. 네 ‘완벽한’ 결혼식을 ‘완벽하게’ 망쳐주마.

**

그날부터 나는 지현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결혼 준비라는 명목 하에, 나는 온갖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맞게, 나의 복수는 ‘처절하게’ 우스꽝스러웠고, ‘치밀하게’ 엉망진창이었다.

첫 번째 타겟은 웨딩드레스였다. 지현은 백설 공주처럼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싶어 했다. 나는 지현이 고른 드레스에 대해 온갖 찬사를 늘어놓으며, 슬쩍 덧붙였다.

“지현아, 이 드레스는 정말 예쁘긴 한데… 네 피부 톤에는 살짝 쿨톤 계열의 아이보리가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아. 이 화이트는 네 얼굴을 좀… 창백하게 만든달까? 내가 볼 땐 이쪽의 약간 노란빛 도는 드레스가 너의 웜톤 피부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어줄 것 같아! 어때? 한 번 입어봐!”

물론 지현은 웜톤이 아니었다. 명백한 쿨톤이었다. 내가 추천한 드레스는 지현의 얼굴색을 칙칙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거울 앞에서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런가? 나는 그냥 흰색이 좋았는데…”

“아니야, 지현아! 너 진짜 예술적 감각이 없다! 이 드레스가 훨씬 고급스러워 보여. 네 우아함을 살려준다고! 민준 오빠가 분명 이걸 더 좋아할 거야!”

나는 민준의 이름을 팔아가며 지현을 설득했다. 결국, 지현은 내가 추천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골랐다. 그녀가 거울 앞에서 한숨을 쉬는 동안, 나는 드레스 자락에 아주 미세한, 하지만 중요한 흠집을 냈다. 결혼식 당일,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신경 쓰일 정도로.

두 번째 타겟은 청첩장이었다. 내가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지현은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청첩장을 만들어주겠다고 자원했다.

“수아야, 네가 디자인해주면 정말 영광이지! 네 감각을 믿어!”

나는 빙긋 웃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마. 나는 밤을 새워가며 청첩장을 디자인했다. 겉보기엔 우아하고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인쇄할 때 특정 각도에서 빛을 받으면, 민준과 지현의 학창 시절, 민망할 정도로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졸업사진이 희미하게 비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청첩장 안쪽에는 QR코드를 넣었는데, 보통은 모바일 청첩장이나 길 안내 지도로 연결되겠지만, 내가 만든 QR코드는 민준이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춤춰라 이모티콘’을 따라 하며 몸부림치던 흑역사 영상으로 연결되게끔 해놓았다.

내가 청첩장 시안을 건네자 지현은 눈을 반짝였다.

“와, 수아야! 역시 너는 천재야! 너무 예뻐! 민준 오빠도 너무 좋아할 거야!”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민준 오빠는 분명 좋아할 거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

내 복수극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지현은 점점 피곤해졌고, 민준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그 과정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결혼식이 열릴 호텔 연회장의 총괄 매니저, 김도윤 씨였다. 그는 내 복수극의 유일한 변수였다.

처음 만난 날, 나는 지현과 함께 웨딩홀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지현은 모든 것에 흡족해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지현아, 이 테이블 세팅은 너무 고루하다. 요즘 유행하는 건 좀 더 파격적인 스타일이야. 접시도 저렇게 일반적인 흰색이면 너무 평범하잖아. 민트색이나 라벤더색으로 바꾸면 훨씬 감각적일 텐데.”

내 말에 지현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런데 매니저님이 이게 가장 인기 있는 스타일이라고 하셨는데…”

“인기 있는 스타일이 곧 세련된 건 아니지. 유행은 돌고 도는 거라지만, 신부의 개성을 살려줄 수 있는 웨딩은 많지 않아. 지현아, 너는 특별하잖아?”

그때였다. 내 뒤에서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이 테이블 세팅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신랑 신부의 동선을 고려한 가장 효율적인 배치입니다. 그리고 접시의 색상은 음식의 미학적 요소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장 보편적인 선택입니다.”

돌아보니, 짙은 남색 수트 차림의 김도윤 매니저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묘하게 졸린 듯한 표정. 그는 내 계획에 없던 인물이었다.

나는 그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 매니저님. 저는 신부의 친구이자 웨딩 코디네이터를 맡은 김수아라고 합니다. 물론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결혼식은 단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잖아요? 저희 신부는 좀 더 특별하고 독창적인 것을 원하거든요.”

도윤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독창적인 건 좋지만, 모든 독창성이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자칫하면 ‘불편한 독창성’이 될 수도 있죠.”

그의 말이 내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불편한 독창성’이라니. 딱 내 복수 계획에 맞는 말이었다. 나는 불쾌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하하, 매니저님은 너무 비관적이시네요. 저희는 매니저님의 도움을 받아 최고의 웨딩을 만들 거예요.”

도윤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최고의 웨딩이요? 글쎄요. 저는 이 결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만.”

그의 말에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마치 내 속셈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함.

**

그 후로도 김도윤 매니저는 내 복수극에 틈틈이 제동을 걸었다. 내가 음식 시식 때 “새콤한 소스와 달콤한 소스를 함께 쓰는 게 어떨까?”라고 제안하면, 그는 “그것은 음식 간의 밸런스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조합입니다. 미식적 테러에 가깝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잘라냈다. 내가 꽃 장식에 ‘말린 마늘꽃’을 섞어 쓰면 특이하고 빈티지한 느낌이 들 것이라고 주장하자, 그는 “마늘꽃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만약 존재한다 한들 결혼식장에서 나는 마늘 냄새는 신랑 신부의 기억을 평생 지배할 겁니다.”라고 일갈했다.

그는 나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기가 막히게 막아냈고, 나는 매번 속으로 분노를 삭여야 했다. 동시에, 그의 예리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

“수아 씨는… 정말 신부의 행복을 위해 이러는 겁니까?” 어느 날, 도윤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럼요! 제 베스트 프렌드인데요!”

그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베스트 프렌드가 이렇게… 악마 같을 리가 없죠.”

나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매니저님, 오해세요!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구요!”

“최선을 다하는 건 보이는데, 그 방향성이 좀 이상하다는 겁니다. 혹시… 신부에게 어떤 원한이라도 있으십니까?”

돌직구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원한이라뇨! 그런 무서운 말씀 마세요. 매니저님은 너무 영화를 많이 보셨나 봐요.”

도윤은 내 미소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글쎄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게 세상 아니겠습니까. 일단, 다음 주에 있을 함 들어가는 날, 그 함에 수아 씨가 넣으려는 ‘두꺼비 한 쌍’은 빼주십시오. 그건 전통이 아니라 미신에 가깝고, 신부에게 심각한 불쾌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함에 두꺼비 모형 한 쌍을 넣으려던 계획까지 어떻게 안 거지? 내 치밀한 복수 계획이 하나둘씩 그의 손에 막히기 시작하자, 나의 복수심은 두 배가 아니라 세 배로 불타올랐다. 이 남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필코 지현의 결혼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다.

**

드디어 대망의 결혼식 당일.

나는 아침 일찍부터 지현의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어젯밤, 나는 마지막 복수 계획을 완성했다. 그것은 바로, 신부 입장 때 흘러나올 배경 음악을 바꾸는 것이었다. 웅장한 클래식 대신, 민준이 대학교 축제 때 술에 취해 열창했던 트로트 곡 ‘내 나이가 어때서’를 은근슬쩍 끼워 넣은 USB를 준비했다. 그리고 신부 대기실에서, 지현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스피커에 연결된 USB를 내가 준비한 것으로 교체했다. 완벽했다.

“수아야, 와줘서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결혼 준비가 정말… 다이나믹했어.”

지현은 피곤에 절은 얼굴로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내심 기뻤지만, 겉으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이나믹이라니! 뭘 그런 말을 해. 난 네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어때? 오늘 드레스도 정말 예쁘다. 어젯밤에 혹시 불편한 부분은 없었어?”

내가 만든 미세한 흠집을 걱정하는 척 물었다. 지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냥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너무 따끔거리는 부분이 있었어. 신경 쓰였지만, 오늘은 그냥 참으려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벽해.

신부 입장이 시작되고, 웅장한 서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지현의 얼굴에 드리워진 긴장과 설렘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래, 실컷 행복해해라. 그 행복, 내가 곧 부숴줄 테니.’

그 순간, 신부 입장곡으로 바뀌어야 할 타이밍에, 웬걸. 예상치 못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문제 없어!’

나는 굳어버렸다. 이건 내가 준비한 트로트 곡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고등학생 때, 수능을 망치고 술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미친 듯이 불렀던 자작곡이었다. 휴대폰 음성 녹음 파일이 분명했다. 어떻게 여기에?

아수라장이 될 뻔한 결혼식장은 갑자기 흥겨운 분위기로 변모했다. 하객들은 당황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지현은 물론, 민준까지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스피커 옆에서 수상한 USB를 슬쩍 빼내는 김도윤 매니저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는 문제 없어.’

그의 손에는 내가 준비했던 USB가 들려 있었다. 언제 바꾼 거지? 어떻게?

내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 상황에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도윤 매니저는 내게 윙크를 날리고는, 능숙하게 다음 곡을 재생시켰다. 다행히 이번에는 원래 준비되었던 웅장한 신부 입장곡이었다. 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민준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현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이 끝난 후, 나는 도윤을 찾아갔다.

“매니저님! 대체 아까 그게 뭐였죠? 제가 준비한 건 ‘내 나이가 어때서’였단 말이에요!”

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거요? 그거야말로 ‘문제 없는’ 신부 입장곡이었죠. 수아 씨, 그 USB는 제가 어제 밤새도록 수아 씨의 컴퓨터를 해킹해서 얻어낸 수아 씨의 흑역사 모음집 USB였습니다. 수아 씨가 제 USB를 바꿀 걸 예상하고 저도 수아 씨의 USB를 바꿨죠. 일종의… 선제공격이랄까요?”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 컴퓨터를 해킹했다구요? 그게 말이 돼요?!”

“수아 씨는 남의 결혼식을 망치려 했으니, 저도 수아 씨의 허를 찌를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수아 씨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는 수아 씨의 복수극을 막아야 했죠. 그게 저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내 복수극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한 방 먹인 셈이었다.

“그리고, 수아 씨.” 도윤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어젯밤, 수아 씨의 컴퓨터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비밀 파일’입니다. 수아 씨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웹툰 시놉시스죠. 저에게는 수아 씨가 왜 그렇게 필사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건넨 종이를 보았다. 그것은 내가 밤늦게 몰래 쓰던, ‘배신당한 여주의 처절한 복수극’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 웹툰의 시놉시스였다.

“수아 씨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승화시키려고 했던 거군요. 대단합니다.”

그는 씨익 웃었다. “어때요? 이제 복수는 그만하고, 이 시놉시스를 웹툰으로 만들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기획 단계에서 조언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대신… 보수는 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죠.”

나는 그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복수극은 망쳤지만, 그는 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그리고 그 제안은… 왠지 모르게 설레는 것이었다.

“제게 복수하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수아 씨의 복수극을 지켜본 결과, 저는 흥미로운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저는 저런 ‘불편한 독창성’을 지닌 사람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물론,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이죠.”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내 복수극은 실패했지만, 그로 인해 나는 완전히 새로운 문을 열게 된 셈이었다. 비록 지현과 민준의 결혼식은 완벽하게 엉망진창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드레스에 낸 흠집, 청첩장에 숨겨둔 흑역사 QR코드… 그것들이 서서히 그들을 괴롭힐 테니까.

나는 도윤의 손에 들린 시놉시스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하지만 저녁 식사는 제가 살게요. 제 흑역사를 들킨 값으로요.”

도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복수는 실패했다. 하지만 ‘착한 김수아’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악마 같은 김수아’와, 그녀를 꿰뚫어 보는 이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이 이야기는, 내가 꿈꾸던 복수극보다 훨씬 더 짜릿하고 흥미진진할 거라는 것을. 아마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훨씬 더 어울리는 그런 이야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