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비무제 제1장: 검은 그림자 드리운 영웅의 전당
비정산(秘精山)의 봉우리가 아득히 푸른 하늘을 찌르고 섰다. 그 웅장한 산세 중턱에 자리한 거대한 비무장(比武場)은 마치 하늘의 신전이라도 되는 양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운명비무제(運命比武祭)’라 불리는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무림 고수들의 기운이 겹겹이 쌓여 산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강청은 비무장 입구에 서서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돌과 나무로 정교하게 짜여진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수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을 법했고, 그 중앙에는 거울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진 검은 현무암 비무대가 고고히 솟아 있었다.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제각기 소속 문파의 문양을 자랑했고, 그 아래로 오색찬란한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긴장, 그리고 감출 수 없는 야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강청.”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쉬이 흩어졌다. 강청의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회한과 굳건한 결의가 함께 담겨 있었다. 몰락한 문파의 마지막 후예로서, 그에게 이 운명비무제는 단순히 천하제일이 되는 것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스승의 유지를 잇고, 사라진 가문의 비밀을 밝혀낼 단 하나의 기회.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강 도련님! 벌써부터 얼어붙은 건 아니겠지?”
돌아보니,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이는 강청과 같은 나이 또래의 젊은 무인이었다. 강호의 떠돌이 무사로 이름 높은 ‘풍운대협(風雲大俠)’의 막내아들, 육진우였다. 그는 강청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비단 무복에 깃털 장식을 달고 있었다.
“육 도련님. 이곳의 기운은 실로 압도적이로군. 감히 ‘운명의 전당’이라 불릴 만하다.” 강청은 담담하게 답했다.
육진우는 껄껄 웃으며 강청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천하의 명운을 건다는 대회가 아니겠나. 보아라, 저기 저 구룡방(九龍幇)의 방주도 왔고, 저쪽에는 무당파의 장문인께서 직접 행차하셨네. 심지어 은둔해 계시던 소림사의 방장까지… 이야,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야.”
육진우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마다 이름만 들어도 강호를 뒤흔들 만한 거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의 존재감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산맥과 같았다. 강청은 그들의 무공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파동을 느끼며 속으로 긴장감을 삼켰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육진우가 돌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 말인가?”
“북해빙궁의 계승자 설화 아가씨가 보이지 않아. 벌써 도착했을 시간인데 말이지. 어제 밤에도 맹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간다고 했거든. 워낙 출중한 실력이라 이번 비무제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분이 아니던가.”
설화(雪花). 북해빙궁의 얼음 같은 무공을 완벽하게 계승한 그녀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강호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신비로운 ‘설한빙백진(雪寒氷魄陣)’은 일찍이 당할 자가 없다는 평이 자자했다. 강청 역시 그녀의 실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었다.
“혹시 길이라도 엇갈렸겠지.” 강청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맹주님께서 직접 그녀의 출전을 간곡히 청했을 정도인데. 게다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려고 벌써부터 기자들이… 아니, 강호의 소문꾼들이 진을 치고 있지 않나.” 육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하단 말이야. 아침부터 맹 내에서도 분위기가 좀 뒤숭숭해 보이고.”
바로 그때였다. 비무장 중앙에 우뚝 솟은 현무암 비무대 위로 한 인영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현천맹(玄天盟)의 맹주이자, 천하의 무인들로부터 ‘천운대사(天運大師)’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고요한 눈빛을 지닌 노인이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마치 태산이 눈앞에 서 있는 듯 압도적이었다. 그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모든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천운대사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인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호의 모든 영웅들이여, 이 자리에 모여주심에 깊은 감사를 표하오.”
그의 목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으나, 비무장 곳곳에 울려 퍼지며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미증유의 위협에 직면해 있소. 동방의 어둠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기운은 이 강호 전체를 잠식하려 들고 있소. 현천맹은 천하의 명운을 걸고, 이 어둠에 맞설 단 한 명의 영웅을 찾기 위해 이 운명비무제를 개최하였소.”
천운대사의 말에 장내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방의 어둠”이라는 모호한 표현에 불안감이 섞였다.
“이 비무제의 우승자는 현천맹이 수십 년간 수호해온 ‘현천보검(玄天寶劍)’을 손에 쥐게 될 것이며, 천하 무림의 수장으로서 모든 문파를 이끌어 어둠에 맞설 것입니다.”
현천보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천하의 모든 사기를 물리친다는 신검이었다. 그 이름이 언급되자 무인들의 눈빛은 더욱 이글거렸다.
“본격적인 비무에 앞서,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 할 듯하오.”
천운대사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낮고 무거워졌다.
“북해빙궁의 계승자, 설화 양이 오늘 새벽, 비정산 인근 객사에서 실종되었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감쪽같이 사라졌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무장은 마치 거대한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으로 가득 찼다.
“실종이라고요?”
“대체 누가 감히…!”
“운명비무제 개막 직전에 이런 일이!”
육진우는 경악한 얼굴로 강청을 돌아보았다. “이럴 수가… 정말 사라졌다고? 대체 누가, 어떻게…?”
강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실종? 우승 후보 중 한 명이 사라졌다?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이 대회에… 첫 비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인가?’
천운대사는 혼란스러운 장내를 다시 한번 압도적인 기세로 제압했다.
“현천맹은 즉시 설화 양의 행방을 쫓을 것이오. 그러나 운명비무제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천하의 명운은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기 때문이오.”
그의 눈빛은 비장함으로 빛났다.
“그럼, 이제 운명비무제의 서막을 엽니다. 모든 참가자는 비무대의 부름에 응하라!”
굉음과 함께 비무장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강청의 귀에는 축포 소리나 환호성 대신, 설화의 실종이라는 불길한 소식만이 맴돌았다. 이 거대한 대회의 밑바닥에는 과연 어떤 어두운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첫 비무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직감은 이 대회가 단순한 무술 겨루기가 아닐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