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은 늘 그랬듯 침묵했다. 마지막 태양이 재가 되어버린 지 수십 년. 문명은 폐허가 되었고, 땅은 독을 품었다. 썩어가는 도시의 잔해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희미한 망자의 속삭임 같기도, 혹은 이 땅에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을 비웃는 조소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스산함 속에서도, 한때 거대한 제국의 심장이었던 ‘천무제단’은 여전히 굳건히 서 있었다. 아니, 굳건하다기보다는, 파괴의 광풍 속에서도 기적처럼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붕괴된 성벽, 무너진 건축물들 사이로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웅장한 비무대. 오늘, 이 죽은 땅의 유일한 생명력이 그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수천, 수만 명의 인파가 폐허가 된 광장을 메웠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절망, 그리고 한 줄기 지푸라기 같은 기대감이 교차했다. 그들은 살아남은 자들이었고, 동시에 언젠가 자신들을 덮칠 미지의 재앙을 기다리는 운명 공동체였다. 이들 모두의 시선은 한곳으로 향했다. 바로 ‘재건비무’의 무대였다.

청운은 낡은 도포 자락을 여미며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얼굴은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젊음이었으나, 눈빛만은 백 년의 풍파를 겪은 노인의 그것처럼 깊고 메말라 있었다. 허리춤에는 거친 천으로 감싼 낡은 목검이 매달려 있었다. 누가 봐도 허름한 행색이었다. 이곳에 모인 내로라하는 무림 고수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길 잃은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흥, 저런 애송이가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다니. 배짱 하나는 가상하군.”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에 청운은 애써 반응하지 않았다. 멸망 이후, 약육강식은 더욱 노골적인 생존 법칙이 되었다. 힘없는 자는 발아래 깔리거나, 잡아먹히는 것이 이 시대의 숙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자들은 모두 제 한몸 건사할 정도의 강함을 가졌다고 자부했다.

청운의 시선은 거대한 비무대를 스캔하듯 훑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풍악 소리, 화려한 의복을 걸친 각 문파의 수장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젊고 기세등등한 무사들. 그들 모두는 비범한 내공과 숙련된 초식을 자랑하듯, 은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은 북쪽 단상에 자리한 사자후 문주의 거대한 체구와, 서쪽 단상에서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 있는 백화문의 젊은 여고수, 그리고 중앙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침묵하는 무혼각주였다. 무혼각주는 이 재건비무를 주최한 이였으며, 이 시대 무림의 정신적 지주로 통했다.

“드디어, 이 날이 왔군.”

청운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스승이 죽기 전 남긴 유언. “이 황폐한 세상에 다시 빛을 가져올 자, 오직 강함을 증명한 자 뿐. 천하의 운명을 걸고 다시 일어설 비무가 열릴 것이다. 그곳에서 너의 길을 찾아라.”

그것은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자, 청운이 이 죽음의 땅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청운의 마음속에는 비장함보다는 냉소가 먼저 피어올랐다. 이 썩어버린 땅에서 천하의 운명이라니. 부질없는 욕심 아닐까. 살아남는 것조차 기적인 세상에서, 누가 감히 천하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쩌렁쩌렁 울리는 북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거대한 비무대의 중앙에, 무혼각주가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주름 깊었으나, 눈빛은 강철처럼 번뜩였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철검이 땅에 박혀 있었고, 그 검에서는 고고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모두 들으라!”

무혼각주의 목소리는 거대한 천둥소리 같았다.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심장을 직접 때리는 듯한 울림이었다.

“수십 년 전, 검은 재앙이 이 땅을 휩쓸었다.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갈라졌다. 문명은 사라지고,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광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거나, 허공을 응시했다. 끔찍했던 그 날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무(武)는 살아남았다! 허나… 그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혼각주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리켰다.

“하늘의 끝에서 새로운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완전히 소멸시킬 최후의 위협이 될 것이다. 우리는 흩어져서는 안 된다. 다시 하나로 뭉쳐, 이 위협에 맞서야 한다!”

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새로운 어둠? 스승은 분명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강함을 증명하라’고 했을 뿐이다.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재건비무’를 개최한다! 천하제일인, 바로 그 자가 이 흩어진 무림을 다시 통합하고, 다가오는 재앙에 맞설 유일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모두의 눈에는 욕망과 함께 미미한 희망이 깃들었다. 천하제일인. 멸망 이후, 그토록 갈구하던 칭호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이 비무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다! 연령, 문파, 출신,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는다. 오직 오직, 너희의 무예와 기개만이 이 자리에서 평가될 것이다! 승자는 모든 것을 얻고, 패자는… 이 재앙 속에서 잊히리라!”

무혼각주의 눈이 광장의 모든 이를 훑었다. 그의 시선은 청운의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이제, 첫 번째 대결을 시작한다!”

북소리가 다시 한번 천지를 뒤흔들었다. 두 명의 무사가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한 명은 거대한 대검을 든 거한이었고, 다른 한 명은 쌍검을 든 날렵한 검객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맹렬한 기세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하압!”

거한의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찍혔다. 묵직한 바람이 비무대를 휘감았다. 검객은 민첩하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고, 동시에 쌍검을 휘둘러 거한의 옆구리를 노렸다. 금속성 마찰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청운은 무표정하게 그들의 대결을 지켜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흥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비무대 위를 가득 채운 살기와 기합 소리만이 그의 귀를 때릴 뿐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길이군.”

그는 허리춤의 낡은 목검을 지그시 만졌다. 거친 나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겉보기엔 볼품없지만, 이 목검에는 스승의 마지막 염원이,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청운은 자신의 차례가 언제 올지 모를 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대결을 응시하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의 심장 속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 이 썩어버린 세상의 운명을, 과연 그가 바꿀 수 있을까.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어디, 한번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