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소드 1: 차가운 유약
**SCENE: 1. 은서의 작업실 – 늦은 밤**
[고요한 작업실. 어스름한 작업등 아래, 은서는 흙으로 빚은 도자기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가마에 넣고 있다. 그녀의 옆얼굴은 그림자에 잠겨 잘 보이지 않는다. 손은 섬세하고 능숙하지만, 그 움직임에는 이상하리만치 생기가 없다. 공기 중에는 흙냄새와 미약하게 타들어 가는 유약 냄새가 섞여 있다. 작업실 한쪽 벽에는 완성된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모두 차갑고 서늘한 푸른빛이 감돈다. 마치 겨울 호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보는 이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색들이다.]
**은서 (내레이션):**
누군가는 내 도자기를 보고 위로를 얻는다고 했다.
차가운 표면 아래 감춰진 따뜻함. 깨지기 쉬운 아름다움.
그들은 몰랐겠지.
이 차가운 유약이 사실은… 뜨거운 불 속에서 수없이 단련된 비명 같은 거라고.
그리고 그 비명의 시작이…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의 손이었다는 걸.
[가마 문을 닫으려던 은서의 손이 잠시 멈춘다. 그녀의 시선은 작업실 한켠, 빛바랜 사진 한 장에 닿는다. 십여 년 전, 앳된 모습의 은서와 수아가 활짝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둘 다 흙으로 얼룩진 앞치마를 입고 있다. 그 시절의 은서는 눈부시게 밝았다.]
**은서 (내레이션):**
수아. 내 전부를 믿고 맡겼던 이름.
그때의 나는, 네가 나의 태양이라고 생각했어.
내 어둠을 밝혀줄, 영원히 타오르는 태양.
[사진 속 수아의 미소가 흐릿해지며, 서서히 과거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화면은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색감으로 물든다.]
**SCENE: 2. 과거 – 은서와 수아의 공동 작업실 (몇 년 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활기 넘치는 작업실. 은서와 수아가 나란히 앉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고, 눈빛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반짝인다. 은서는 흙을 만지고, 수아는 스케치북에 뭔가를 부지런히 그리고 있다.]
**은서:**
(들뜬 목소리로) 수아, 이거 봐! 새로 개발한 유약인데… 빛에 따라 색이 미묘하게 변해. 마치 물속에 비친 노을 같지 않아? 신비롭지?
[은서가 갓 구워낸 작은 도자기 조각을 수아에게 내민다. 도자기는 은은한 그라데이션을 띠며, 손 안에서 섬세하게 빛난다. 푸른빛이 옅어졌다 짙어지며 안개처럼 번진다.]
**수아:**
(두 눈을 반짝이며 도자기를 받쳐 들고) 와, 은서야! 이거 정말 대박인데? 네 ‘물안개 유약’ 기법에 이걸 접목하면… 사람들이 정말 좋아할 거야! 이걸로 우리가 꿈꾸던 브랜드를 만들면…!
**은서:**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만들 그 브랜드 이름은… ‘새벽안개’ 어때?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듯, 은은하고 신비로운 느낌… 우리의 도자기처럼 말이야.
**수아:**
(은서의 어깨를 힘껏 껴안으며) 완벽해! 역시 넌 천재라니까! 우리 둘이 같이 하면 못 할 게 없을 거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우리 손으로 만들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다. 스케치북에는 ‘새벽안개’라는 글자와 함께, 은서의 유약 기법을 활용한 제품 디자인 스케치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수아의 손이 은서의 어깨를 토닥이는 모습에서 진한 우정과 믿음이 느껴진다.]
**SCENE: 3. 현재 – 은서의 작업실 (밤)**
[다시 현재. 화면은 차갑고 어두운 톤으로 돌아온다. 은서는 그 사진을 손에 든 채, 씁쓸하고 메마른 미소를 짓는다. 사진 속 수아의 해맑은 웃음이 지금은 비웃음처럼 느껴진다.]
**은서 (내레이션):**
못 할 게 없을 거라고? 그래. 네 말대로였다.
너는… 못 할 짓이 없었으니까.
[회상 장면이 빠르게, 그리고 잔혹하게 스쳐 지나간다. ‘새벽안개’라는 이름으로, 수아의 얼굴이 크게 박힌 포스터와 함께 대대적으로 홍보되는 브랜드 런칭 파티.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수아.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능숙하게 인터뷰에 응하며, 자신의 ‘새벽안개’ 철학을 설명하는 그녀의 얼굴. 그리고 홀로 차가운 작업실에 앉아, TV 속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서의 절망적인 얼굴. 그녀의 손에는 수아에게 보냈던 수많은 메시지들이 ‘읽지 않음’ 상태로 남아있는 휴대폰이 들려 있다. 화면은 ‘배신’이라는 붉은 글자와 함께 그녀의 눈물로 일렁인다.]
**은서 (내레이션):**
내 물안개 유약 기법, 내 ‘새벽안개’ 디자인…
내 모든 열정과 꿈이, 네 이름 아래 포장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깨달았지. 네가 내 태양이 아니라, 내 심장을 파먹는 거머리였다는 걸.
그 비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은서가 사진을 조용히 내려놓고, 작업대 위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평소 그녀가 만들던 차가운 푸른빛의 도자기와는 사뭇 다른, 새빨간 유약이 칠해진 작은 항아리가 놓여 있다. 그 색은 마치 심장이 터져 나온 피처럼 선명하고 강렬하다. 핏빛처럼 타오르는 붉은색이 어둠 속에서 유독 도드라진다.]
**은서 (내레이션):**
처음엔 좌절했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지.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어.
내가 무너지는 동안, 너는 내 꿈을 훔쳐 세상의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서 있었으니까.
그래선 안 되잖아.
[은서가 붉은 항아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다. 항아리의 표면에는 섬세하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미묘하게 균열이 가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불길하고 위태로운 느낌을 준다. 마치 핏줄이 얽힌 듯한 무늬들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은서 (내레이션):**
나는 다시 흙을 만졌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차가운 물을 섞고, 뜨거운 불에 굽고.
그렇게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유약에 녹여냈다.
네가 훔쳐 간 ‘새벽안개’는 가짜야.
진정한 새벽은… 어둠이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되니까.
[은서의 얼굴이 작업등 아래 드러난다. 전보다 훨씬 차갑고, 날카롭다. 눈빛에는 어딘지 모르게 광기 어린 결심이 서려 있다.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망설임 없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화면에는 수아의 프로필 사진이 떠 있다. 그녀는 심호흡 한 번 하지 않고 메시지를 작성한다.]
**SCENE: 4. 수아의 화려한 갤러리 – 낮**
[수아의 갤러리. ‘새벽안개’라는 로고가 새겨진 세련된 간판이 햇빛 아래 반짝인다. 내부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함께 수아의 도자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아는 기자들과 팬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으며 사인을 해주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자신감과 성공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름답다.]
**기자 A:**
(마이크를 들이대며) 수아 작가님! 이번 ‘새벽안개’ 신작 전시회도 대성공입니다! 특별히 영감을 받으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수아:**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네, 저는 늘 자연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새벽녘 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함에서… 제 작품의 철학이 시작되죠. 저는 그 신비롭고 덧없는 아름다움을 도자기에 담아내려 노력합니다.
[수아는 우아한 손짓으로 자신의 작품을 가리킨다. 그녀의 작품들은 은서의 ‘물안개 유약’ 기법과 매우 흡사한 푸른빛과 그라데이션을 띠고 있다. 바로 그때, 수아의 휴대폰이 ‘띠링’ 소리를 내며 울린다. 그녀는 잠시 미소를 잃고, 순간적으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화면을 확인한다.]
[화면에는 한 장의 사진과 짧은 메시지가 떠 있다. 사진 속에는 은서가 들고 있던 그 붉은 항아리가 섬뜩하게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 아래, 발신자 ‘은서’라고 찍힌 메시지가 보인다.]
**메시지 (은서):**
네가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진실을 찾아줄게.
아니, 정확히는… 네가 내게서 훔쳐 간 것들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똑똑히 보여줄게.
‘새벽’은… 이제 막 밝아오고 있으니.
[수아의 얼굴에서 가면처럼 붙어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주변의 환한 조명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칭찬의 소리들이 멀어지는 듯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오직 은서의 목소리만이 맴도는 것 같다. 그녀의 완벽한 표정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수아 (속마음):**
은서…? 감히… 이젠 죽은 줄 알았는데…!
**SCENE: 5. 은서의 작업실 – 늦은 밤**
[다시 은서의 작업실. 붉은 항아리는 가마에서 갓 꺼내져 식히는 중이다. 항아리는 여전히 강렬한 붉은빛을 띠고 있다. 균열처럼 보이는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꿈틀거리는 착시를 일으킨다. 은서는 그 항아리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라기보다는 섬뜩한 만족감이 걸려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발한다.]
**은서 (내레이션):**
네가 ‘새벽안개’라는 이름을 더럽혔으니,
나는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네 모든 것을 재로 만들 것이다.
이제 시작이야, 수아.
내가 널 위해 준비한, 가장 잔인하고 아름다운 작품.
이 차가운 유약은… 네 비명이 될 테니까.
[은서가 항아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붉은빛이 그녀의 손끝에 닿자 더욱 선명해지는 듯하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운 결의로 가득 차 있다. 바깥은 아직 깊은 밤이지만,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하고 끔찍한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화면 암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