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시, 1403호 주지수의 아파트는 적막했다. 정확히는, 적막해야만 했다. 지수는 이 고요를 사랑했다. 퇴근 후 이어지는 혼자만의 시간, 넷플릭스를 켜고 허물어진 자세로 소파에 몸을 던지는 것. 바로 지금처럼.
“크, 이게 바로 낙원이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려 잔을 들었다. 갓 우려낸 루이보스 티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딱 좋은 온도였다. 잔을 입술에 대려는 순간, 손에 쥔 컵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악!”
뜨거운 차가 소파 패브릭 위로 쏟아졌다. 지수는 펄쩍 뛰며 손을 털었다.
“젠장! 이게 뭐야?!”
컵은 여전히 지수의 손에 단단히 쥐여 있었다. 미끄러진 게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컵을 툭 친 것처럼. 지수는 젖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착각인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소파 커버를 벗겨내 세탁실로 향했다. 세탁기에 던져 넣고 돌아서려는데, 뒤편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세탁기 위에 놓여있던 섬유 유연제 통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용물이 쏟아져 축축한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어… 야, 너 왜 거기서 떨어져?”
지수는 섬유 유연제를 들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어두운 세탁실의 형광등이 깜빡깜빡,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필 오늘따라 왜 이래?!”
짜증이 폭발한 지수가 소리치자, 형광등은 마치 놀란 듯 순간 탁, 하고 꺼져버렸다.
“악!!!”
비명과 함께 지수는 세탁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뭔가 이상했다.
다음 날 아침, 지수는 어제 일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애써 합리화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칫솔을 들고 거울 앞에 섰는데, 치약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결국 새로 개봉한 치약을 썼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지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려는데, 맥주 병들 사이에 흰색 튜브가 삐죽 솟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응? 이게 왜 여기…?”
지수는 의아하게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잃어버렸던 치약이었다. 차가운 치약을 든 채 지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냉장고에 치약이라니?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날 밤, 지수는 잠 못 이루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노려봤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인형들의 눈이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스륵. 옷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헙!”
지수는 이불 속으로 완전히 숨어버렸다. 오들오들 떨면서 눈만 빼꼼 내밀었다. 어둠 속에서 옷장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서서히, 그리고 삐걱거리면서. 마치 누군가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려는 것처럼.
“거… 거기 누구 있어요?”
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옷장 문은 여전히 열리고 있었다. 지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아니기를.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지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옷장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어제 입었던 잠옷이 깨끗하게 개어져서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제 벗어 던져놨던 잠옷이었다.
“뭐야… 이건 또…”
소름이 돋았다. 이건 귀신이 확실했다. 그것도 아주 깔끔한 귀신.
지수는 당장 이사를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전세 보증금은 어떻게 하고?! 지수는 결국 부동산 대신 용하다는 무속인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TV가 지직거리며 채널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뉴스에서 드라마, 홈쇼핑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야! 너… 너 설마 보고 있는 거야?!”
지수가 리모컨을 든 채 소리치자, TV는 픽, 하고 꺼졌다.
“하… 진짜 돌겠다.”
지수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신경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랐다. 이건 공포였다기보다는, 이제 짜증이 폭발하는 지경이었다. 그때 현관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누… 누구세요?”
“저, 1402호 차현우입니다. 혹시… 소란스러우신가 해서요.”
차현우. 그 빌라에 사는 잘생긴 남자. 지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소란스럽다니? 어젯밤 지른 비명소리가 들린 걸까? 아니면 TV가 갑자기 꺼지는 소리?
“아, 그게… 별일 아니에요.”
“아니, 어제부터 뭔가 쿵쾅거리고… 벽에서 이상한 소리도 좀 나는 것 같아서요.”
지수는 문틈으로 현우를 힐끗 봤다. 멀끔한 얼굴에 걱정스러운 눈빛.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아… 제가 좀 부주의해서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혹시… 뭔가 도움이 필요하신가 해서요?”
현우의 말에 지수는 순간 솔깃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못 살 것 같았다. 귀신이든 폴터가이스트든,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저… 사실은… 집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지수는 결국 현관문을 열고 현우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차가운 치약, 개어진 잠옷, 멋대로 움직이는 TV까지. 현우는 지수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미쳤다고 생각했을 법한 이야기를, 그는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인가요?”
현우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폴… 뭐가요?”
“폴터가이스트요. 물건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는 등의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유령 또는 영적인 존재를 뜻하죠.”
“와… 그걸 아세요?”
“제가 그런 쪽에 좀 관심이 많습니다. 혹시… 제가 좀 봐드려도 될까요?”
지수는 현우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대로 죽는 것보단 나았다. 그렇게 차현우는 지수의 1403호에 발을 들였다.
“일단 카메라 설치부터 할까요?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센서도 좋고요.”
현우는 진지하게 제안했다. 마치 유령 사냥꾼이 된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장비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열정적으로 카메라를 설치하고, 지수에게 녹화 방법을 설명했다.
“어… 이거 다 현우씨 거예요?”
“네, 취미로 모으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취미가… 유령 잡는 거예요?”
“정확히는 미스터리 현상 분석입니다.”
지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든든했다. 최소한 혼자 덜덜 떨 필요는 없으니까.
며칠 밤낮으로 카메라를 설치하고 지켜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하지만 현우가 없는 순간에는 여전히 기괴한 일들이 벌어졌다. 지수가 먹으려던 딸기우유가 사라지고, 대신 냉장고에는 현우가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다. 욕실에서는 지수의 샴푸가 사라지고 현우의 비누가 놓여있었다.
“이거… 현우씨가 가져온 거예요?”
지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현우를 봤다. 현우는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집에 있는 비누 안 씁니다. 이런 비누 본 적도 없는데요?”
“분명 여기 있었는데… 그럼 이 아메리카노는요? 제 딸기우유는 어디 갔어요?”
“저… 제가 어제 마시던 아메리카노 같은데요. 제가 어제 혹시 실수로 두고 갔나요?”
현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지수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 밤, 지수와 현우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카메라가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혹시… 이 폴터가이스트는 우리가 같이 있을 땐 안 나타나는 거 아니에요?”
지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때였다. 거실 한복판에 놓여있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이 스르륵, 움직였다. 그리고 TV가 저절로 켜졌다.
“어?”
지수와 현우는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TV 화면에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화면 속 여주인공이 “사랑해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현우가 놀라서 리모컨을 잡으려 했지만, 리모컨은 그의 손을 피해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탁자 위에서 꽃병이 쓰러지면서 예쁜 꽃잎들이 지수와 현우 위로 흩날렸다.
“이… 이건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지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꽃잎, 로맨틱 코미디, 사랑 고백. 이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꾸민 듯한 상황이었다.
“혹시… 얘가 저희를 연결해주려는 걸까요?”
현우가 엉뚱한 말을 던졌다. 지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하!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폴터가이스트가 중매쟁이에요?”
그 순간, 지수의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현우의 휴대폰이었다. 현우는 당황해서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제 전화가 왜 지수씨한테…?”
지수는 휴대폰을 들고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현우♡’였다. 그리고 현우의 휴대폰에서는 ‘지수♡’에게 전화가 걸리고 있었다.
“어…”
둘은 동시에 얼굴이 붉어졌다. 폴터가이스트가 아니라, 이젠 아예 대놓고 이 둘을 엮으려는 듯한 기묘한 상황이었다.
“이것 봐요… 얘가 우리한테… 우리한테 뭔가 원하는 것 같아요.”
현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지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요. 그냥 오류겠죠.”
하지만 오류라고 하기엔 너무나 의도적이었다. 지수와 현우는 서로의 휴대폰을 맞잡은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거실에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배경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꽃잎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때, 현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 폴터가이스트 때문에 지수씨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솔직히 좀 좋았어요.”
지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네?”
“평소에는 말 걸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같이 밤늦게까지 있고… 어… 좋은 시간이었다는 뜻입니다.”
현우는 말을 더듬었다.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도 그랬다. 기괴한 현상들 속에서도 현우와 함께 있을 때는 불안함보다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어설픈 열정과 순수한 모습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저도… 나쁘지 않았어요. 현우씨 덕분에 덜 무서웠고…”
그 순간, 거실의 불이 탁, 하고 꺼졌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희미하게 빛나는 휴대폰 불빛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저… 근데 제가 잃어버린 딸기우유… 혹시 지금 냉장고에 다시 있지 않을까요?”
지수가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현우는 피식 웃었다.
“가볼까요?”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냉장고 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어제 사라졌던 딸기우유와 오늘 사라졌던 샴푸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삐죽 고개를 내민 칫솔과 차가운 치약이 있었다.
“크크… 정말 엉뚱하네요, 얘.”
지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현우도 따라 웃었다.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폴터가이스트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두렵거나 짜증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이한 존재가 자신들을 이어준, 귀엽고 엉뚱한 중매쟁이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지수와 현우의 1403호와 1402호는 종종 기이한 현상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가끔은 지수의 속옷이 현우의 건조대에 널려있기도 했고, 현우가 아끼던 피규어가 지수의 베개 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한번은 두 사람의 컵라면이 저절로 끓여져서 식탁에 놓여있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집을 오가며 물건들을 찾아주는 과정에서 웃음꽃을 피웠고, 그 작은 소동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휴, 오늘도 얘가 일을 저질렀네요.”
지수가 현우의 손에 들린 자신의 잃어버린 수건을 보며 말했다. 현우는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지수씨 볼 핑계가 생겼잖아요.”
지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의 아파트에는 여전히 엉뚱한 폴터가이스트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폴터가이스트는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주는, 특별한 수호신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삑삑거리는 현관문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먼저 집에 도착한 상대를 기다리며 어딘가에 숨겨진 물건을 찾는 게 일상이 된 지수와 현우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 폴터가이스트는, 처음부터 외로운 아파트를 벗어나 둘이 함께하는 따뜻한 집을 꿈꿨던 건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