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한이솔. 아니, 그랬었다. 스물아홉의 나, 잦은 야근과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으로 얼룩진 인생은 꽤나 한심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비 오는 날 퇴근길, 횡단보도를 건너다 미끄러진 발에 몸이 휘청했고,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찧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저 ‘아, 내일 아침 출근은 어쩌지’ 따위의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얼마나 오래 부유했을까. 시간도 공간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의 파편들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고독했다. 두려웠다. 영원히 이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단어일 뿐인가 보다.
어느 순간,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감각들이 터져 나왔다. 축축하고 기분 좋은 흙냄새,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 피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 그리고, 빛.
눈을 뜨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띠었다. 이름 모를 꽃들은 제각기 신비로운 색을 뽐내며 빛을 발했고, 공기 중에는 옅은 마법의 잔향이 감돌았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아니, 그보다 훨씬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뭐야…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삐익, 하고 가늘게 울리는 소리. 그리고 이 몸은?
화들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이름 모를 풀줄기 위였다. 그리고 내 몸은… 두 손이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조그맣고 투명하며, 희미하게 빛나는 구형의 존재. 마치 반딧불이처럼 작고, 빛을 뿜어내는 정령 같은 모습이었다. 온몸을 이루는 것은 얇고 연약한 막, 그 안에 아주 작은 심장처럼 반짝이는 핵이 보였다.
“내가… 내가 이렇게 됐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죽은 건 알겠지만, 환생이라니. 그것도 인간이 아닌 이런… 이런 존재로? 나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온몸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내 작은 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사방은 낯설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위협적이었다. 숲의 깊은 곳에서 낮은 포효 소리가 들려왔고, 나뭇가지 사이로는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이런 몸으로는 이 숲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멀리서 느껴지던 진동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쿵, 쿵, 하고 땅이 울렸다. 숲속의 모든 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새들의 지저귐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사라졌다. 오직 거대한 발걸음 소리만이 이 고요를 깨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풀줄기 아래로 몸을 숨겼다. 내가 발하는 희미한 빛마저도 숨기려고 애썼다. 공포가 내 작은 핵을 휘감았다. 죽음의 공포. 다시 한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그림자가 내 눈앞에 드리웠다.
풀 사이로 겨우 올려다본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발이었다. 사람의 발과 비슷하지만, 훨씬 크고 억센 근육이 얽혀 있었고, 뾰족한 발톱이 박혀 있었다. 발목 위로는 두꺼운 털이 뒤덮여 있었고, 짐승의 기운이 짙게 풍겨 왔다.
그것은 멈춰 섰다. 바로 내 앞에서.
숨조차 쉬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제발, 제발 나를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는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한입거리조차 되지 않을 것 같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경계하는 듯한 소리. 이어서 무언가 숙이는 소리, 그리고 짙은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몸집. 칠흑 같은 털로 뒤덮인 두터운 팔과 어깨. 그리고… 얼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인간은 아니었다. 뾰족하게 솟은 늑대의 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난 입술, 그리고… 숲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그는 사냥꾼이었다. 이 숲의 정점에 선 포식자. 한눈에 봐도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내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게 해주는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그의 눈동자에 내가 포착되는 순간, 내 목숨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아니 내 핵이 미친 듯이 뛰었다.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내가 숨어 있는 곳을 향했다.
금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끝이다. 이렇게 다시 죽는 건가.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포식자의 잔혹함이 아닌, 묘한 호기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는 그에게 먹잇감조차 되지 못할, 그저 작은 빛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나를 똑똑히 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늑대의 발톱처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가락이, 내가 숨어 있는 풀줄기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끝이다.
서늘한 그림자가 내 작은 몸을 덮었다. 그러나 통증은 없었다. 대신,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 끝이 나를 건드린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마치 깨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듯이.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너무나도 가까이. 그 눈 속에는 여전히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씁쓸한 기색도 함께.
그는 조용히 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나는 풀줄기에서 떨어져 공중에 부유했다. 내 몸은 그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을 것처럼 흔들렸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뭘 그리 우두커니 서 계십니까? 사냥감이 도망치겠습니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나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이내 손을 거두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허공에 부유하다가, 이내 풀줄기 위로 다시 떨어졌다. 그의 잔향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짙은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편안함을 주는 향.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사냥꾼의 무리가 숲의 깊은 곳으로 향하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이 거대하고 위험한 숲에서, 나는 너무나도 작고 약한 존재.
그리고 그는, 이 숲의 정점에 선 강대한 포식자.
나는 무사했다.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그 짧은 순간의 접촉이, 내 작은 핵에 강렬한 각인을 남겼다.
그와 나. 종족도, 크기도, 힘도, 모든 것이 다른 우리.
과연 나는 이 낯선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문득, 그의 금빛 눈동자에 스쳤던 그 씁쓸한 기색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금지된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깊고도 슬픈 눈빛이었다.
내 이 새로운 생은,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가늘게 빛나는 내 몸은, 알 수 없는 예감에 미미하게 떨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