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심연의 부름
바람 한 점 없는 폐허의 틈새로 겨우 비집고 들어선 길은 습하고 눅눅한 흙냄새로 가득했다. 천장에서는 불규칙하게 물방울이 떨어져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 현우는 한 손에 투박한 철제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춤의 단검을 단단히 쥐었다. 횃불의 희미한 불빛이 좁은 통로를 따라 길게 늘어졌고,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벽면의 기괴한 문양들을 춤추게 했다.
“선배, 여기 좀 이상해요.”
뒤따르던 유리가 숨을 멈추고 속삭였다. 그녀는 등 뒤의 배낭을 고쳐 매며 주변을 경계했다. 얇은 스웨터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현우는 짧게 물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은 횃불 너머의 어둠 속을 끊임없이 살폈다. 이 좁은 통로가 예상보다 훨씬 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원래 이 정도쯤 되면 ‘기어 다니는 짐승’들이 한두 마리쯤은 나와야 하는데, 너무 조용해요. 마치 우리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리의 말이 옳았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의 지하 통로에서는 끈적이는 발자국 소리만 내며 기어 다니는 몬스터들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우리들의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위험한 거야. 큰놈이 나올 땐 대개 작은 놈들은 자취를 감추지.”
그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흙으로 뒤덮인 바닥은 진흙탕처럼 질척거렸고, 걷다 보면 발이 푹푹 빠지기 일쑤였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이런 곳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가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선배, 저기… 빛이 보여요.” 유리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푸른빛이 통로의 끝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빛을 찾아 헤매던 눈에는 그 희미한 푸른빛이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방심하지 마.” 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런 식으로 꾀어내는 놈들이 더 위험해.”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빛은 희망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오래된 유적의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이나 식수원일 수도 있었다. 생존이 걸린 일이었다.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어둠은 거짓말처럼 걷혔다. 눈앞에는 거대한 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그 규모에 유리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동굴의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이 곳곳에 박혀 신비로운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동굴 전체를 은은하게 비추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와… 여기 진짜 예쁘다.” 유리가 감탄했다.
하지만 현우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더욱 깊어졌다. 아름다움은 대개 위장을 위한 도구였다. 그는 동굴 바닥에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들을 훑어봤다. 무언가에 긁힌 듯한 깊은 자국들,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
“선배… 저기 좀 보세요.” 유리가 다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동굴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 기둥이 솟아 있었고, 그 주변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연못의 가장자리에는 누군가가 정성껏 놓아둔 것처럼 보이는, 잘 정돈된 식량 꾸러미와 약초들이 놓여 있었다. 낡았지만 쓸 만해 보이는 단검도 있었다.
“…이건 함정이야.” 현우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누가 이런 곳에 이걸 두고 갔을 리 없어. 그것도 이렇게 말끔하게.”
“하지만… 물이에요. 마실 수 있는 물!” 유리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갈증에 허덕이는 우리들의 상황을 잊을 수 없었다. 이 폐허에서는 깨끗한 물 한 모금이 금보다 귀했다.
현우는 유리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경험은 그를 경고했다. 너무나 완벽한 유혹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푸른 수정들이 박힌 천장, 바위 기둥의 그림자, 그리고 연못의 깊은 물 속까지.
그때였다. 연못에서 잔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하고 규칙적인 움직임이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선배, 물이… 움직여요.” 유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현우는 이미 단검을 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연못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이 점점 더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푸른빛 수정이 반사되어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연못의 물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물기둥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흡사 뱀과 물고기를 뒤섞어 놓은 듯한 형태였다. 매끄럽고 축축한 비늘로 뒤덮인 몸통은 푸른 수정빛을 반사하며 기이한 광채를 뿜었고, 여섯 개의 날카로운 지느러미는 마치 칼날처럼 솟아 있었다. 머리에는 이빨이 촘촘히 박힌 턱이 자리하고 있었고, 검고 깊은 눈동자가 현우와 유리를 향해 섬뜩하게 빛났다.
“새로운 종이야… ‘심연의 비늘 뱀’인가!”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본 적 없는 몬스터였다.
괴물은 땅바닥에 몸을 내던지듯 착지하며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켰다. 주변의 돌멩이들이 튀어 올랐고, 현우와 유리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괴물의 거대한 몸통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도망쳐, 유리!” 현우가 소리쳤다. “빨리 통로로 돌아가!”
하지만 유리는 이미 발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의 기괴하고 아름다운 동시에 끔찍한 괴물의 모습에 그녀는 얼어붙어 버렸다.
괴물은 비명 같은 포효를 터뜨리며 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현우는 필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져 날카로운 턱을 겨우 피했다. 괴물의 턱이 바닥을 찍자 쩌렁쩌렁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부서져 나갔다.
현우는 바닥에 구르면서도 횃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이빨이 박힌 턱을 피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괴물의 몸통은 육중하고 빨랐다. 여섯 개의 지느러미는 마치 육지에서도 움직일 수 있도록 진화한 다리처럼 기괴하게 움직였다.
“유리! 정신 차려! 저놈은 빛에 민감해!” 현우는 급하게 소리쳤다. 횃불의 불꽃이 격렬한 움직임에 흔들렸다.
유리의 눈빛에 겨우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통로 입구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괴물은 다시 몸을 틀어 현우에게로 향했다.
현우는 몬스터의 거대한 몸통을 노려봤다. 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빛에 민감하다’는 그의 외침은 직감이었다. 푸른 수정들이 가득한 이 동굴에서, 괴물의 눈은 빛을 피해 검게 빛났다.
“하아… 젠장.” 현우는 짧게 욕설을 뱉었다. 이 좁은 동굴에서 저런 거대한 놈과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괴물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왔다. 현우는 몸을 굽혀 꼬리를 피했지만, 꼬리가 일으킨 바람에 횃불의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바로 그때, 유리가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주변의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 속에서도 현우의 말을 떠올렸다. ‘빛에 민감해.’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돌멩이를 있는 힘껏 연못의 푸른 수정들을 향해 던졌다.
캉! 쨍그랑!
돌멩이는 정확히 연못 주변의 수정 기둥에 명중했다. 수정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갈라졌고, 순간적으로 주변의 푸른빛이 희미해졌다.
그 찰나, 괴물은 비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밝은 빛에 노출된 눈처럼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지금이야!” 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괴물의 측면으로 달려들었다. 단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를 찔러야 할까? 육중한 비늘은 그의 단검으로는 뚫기 어려웠다.
그는 문득 괴물이 솟아났던 연못을 봤다. 연못에는 푸른 물이 다시 고여 있었고, 바위 기둥 주변에 놓여 있던 ‘함정’ 식량 꾸러미들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현우는 괴물의 눈을 다시 확인했다. 괴물의 눈은 빛이 줄어들자 잠시 흐릿해진 듯했다. 그는 지체 없이 단검을 든 채 괴물의 몸통을 따라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비늘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괴물은 몸을 흔들며 현우를 떨어뜨리려 했다. 현우는 악착같이 비늘 틈새를 움켜쥐었다. 괴물의 목 부분, 그 비늘이 가장 얇아 보이는 곳까지 도달하자 현우는 있는 힘껏 단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날카로운 단검이 비늘 사이를 뚫고 들어가는 깊숙한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인간의 귀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괴물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고, 현우는 간신히 비늘 틈새에 매달려 버텼다.
괴물의 몸부림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푸른 수정들이 흔들리고,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현우는 단검을 놓지 않고 괴물의 상처를 더욱 깊이 찔러 넣었다.
쿠당탕!
거대한 몸집이 결국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동굴에 한바탕 지진이라도 난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푸른빛은 더욱 희미해졌다.
현우는 축 늘어진 괴물의 등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온몸은 땀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괴물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거대한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선배… 괜찮으세요?” 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다행히 우리가 놈의 약점을 찾아냈어.”
그는 아직 완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주변을 다시 살폈다. 괴물은 죽었지만, 이 동굴이 이 놈 하나만의 서식지는 아닐 터였다.
현우는 괴물의 시체를 훑어봤다. 푸른 비늘은 경이로울 정도로 단단했고, 그의 단검이 뚫고 들어간 곳은 오직 약점이었던 목의 얇은 비늘뿐이었다. 이 놈의 비늘을 벗겨내어 방어구로 만든다면… 현우는 피곤한 눈을 깜빡였다.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사냥을 멈출 수 없었다.
“저놈이 지키던 물이야.” 현우는 연못을 가리켰다. “오염되지 않았다면, 당분간은 갈증 걱정을 덜겠지.”
유리는 말없이 연못으로 다가가 작은 병에 조심스럽게 물을 담았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현우는 괴물의 거대한 몸통에서 ‘핵’을 찾아야 했다. 놈의 몸속에는 분명 더 귀한 것이 있을 터였다. 그는 단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이 암울한 폐허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될 것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위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하늘 없는 동굴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푸른 수정들이 여전히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무수한 미지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유리, 핵을 찾아야 해. 그리고… 저놈의 비늘도 몇 개 가져가자. 쓸모가 있을 거야.” 현우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듯한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제는 희망과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나아가야 했다. 푸른 수정의 빛은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미지의 심연 속으로 이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