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의 소리
밤 11시 37분. 스물일곱 평짜리 아파트 2701호는 고층 빌딩 숲에서 홀로 떨어진 섬처럼 고요했다. 이서준은 넓지도 좁지도 않은 작업실, 아니 그의 표현대로라면 ‘게임과 코딩의 성지’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듀얼 모니터의 푸른빛이 그의 안경 너머로 번뜩였다. 막 출시된 생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버그를 잡던 중이었다. 컵라면 국물이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왼쪽 모니터가 일순간 깜빡였다. 딱, 하고 짧게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암전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젠장, 또야?”
서준은 안경을 고쳐 쓰며 투덜거렸다. 요즘 들어 모니터가 제멋대로였다.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오래 써서 맛이 갔나 싶었지만, 고작 2년 된 제품이었다. 접촉 불량인가 싶어 전원 케이블을 꾹 눌러봤지만, 딱히 흔들리는 기색은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황량한 행성의 자원 추출 시설을 설계하며 다음 단계를 구상했다. 하지만 집중은 오래가지 못했다.
등 뒤에서 희미한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서준은 어깨 너머로 흘끗 뒤를 돌아봤다. 문이 닫힌 주방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주방 싱크대 선반 위에는 겹겹이 쌓아둔 접시들이 있었다. 아마도 밤늦게 온도차로 인해 접시들이 팽창하거나 수축하면서 나는 소리일 거라 생각했다.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게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주 가볍게, 그러나 명확하게, 뭔가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서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뭐야, 고양이도 없는데.”
그는 게임을 잠시 멈추고 작업실 문을 열었다. 복도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에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며칠 전 친구에게 선물 받은 소형 우주선 모형이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 모형은 원래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테이블 가장자리,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내가 어디에 뒀었지?”
서준은 자신이 모형을 정확히 테이블 중앙에 두었던 것을 기억했다. 분명히. 혹시 자신이 테이블을 오가면서 무의식적으로 건드렸나 싶었지만, 지나가다 스치기엔 애매한 위치였다. 바람이 들어와서 그런가? 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괜한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서준은 모형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는 작업실로 돌아왔다. 불쾌한 기분 탓인지, 게임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모니터를 끄고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혼자 살면서 신경이 예민해진 탓인가.
그때, 거실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명확한, ‘쨍그랑’ 하는 소리였다.
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는 확실히 뭔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유리나 도자기 같은 깨지기 쉬운 물건. 심장이 쿵쾅거렸다. 침착하려 애썼지만, 본능적인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혹시 도둑인가? 그는 주방 찬장에 넣어둔 작은 호신용 랜턴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게 작업실 문을 열고 거실로 향했다. 어두운 거실, 희미한 달빛만이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바닥에… 뭔가가 반짝였다. 서준은 휴대폰 손전등을 켜서 바닥을 비췄다.
테이블 위에서 방금 전 자신이 다시 제자리에 놓았던 그 우주선 모형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 있었다. 플라스틱 재질이라 유리처럼 깨진 건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파손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모형의 파편 사이로, 투명한 작은 조각들이 반짝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작은 유리 조각들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의 파편인 양.
“이… 이건 대체…”
서준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모형이 떨어진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파편이었다. 이 아파트에 이런 유리 제품은 없었다. 게다가 모형은 테이블 중앙에 있었다. 그게 혼자 떨어져서, 그것도 저렇게 산산조각 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움찔 떨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오한이 들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가운데, 천장을 지탱하는 기둥 옆,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환영인가? 착각인가?
아니, 서준은 확신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때, 천장의 거실 등이 스스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전구 하나가 완전히 나간 것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불안한 주파수로. 이어서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의 숫자들이 미친 듯이 뒤섞이며 알 수 없는 기호들로 바뀌었다. 삐빅, 삐비비빅! 불규칙한 전자음이 공간을 채웠다.
서준은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그의 이성을 잠식하려 들었다. 이건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었다. 누전이나 고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갑자기, 거실의 커다란 창문이 ‘쿵!’ 하고 흔들렸다. 창밖의 도시 야경이 찰나 흔들렸다. 마치 유리 너머의 세상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서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만 나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거실 테이블 위, 아까 깨진 우주선 모형이 놓여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작고 둥근 물체 하나가 떠올랐다. 그의 엄지손톱만 한 크기였다.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는 그것은 마치 아주 작은 행성처럼 천천히 회전했다. 그리고 그 물체 주변의 공간이 일렁였다. 공기가 왜곡되는 것처럼, 마치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보는 듯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푸른 빛의 작은 구체가 회전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에 비례해 주변의 일렁임도 격렬해졌다. 서준의 아파트 전체가 고주파의 진동에 휩싸이는 듯했다. 그의 치아와 뼈까지 울리는 것 같은 느낌. 벽에 걸린 그림 액자들이 사납게 흔들리며 떨어져 내렸다. 식탁 의자들이 저절로 움직이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렸다.
“그만… 그만해…!”
서준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진동에 묻혀 형체를 잃었다. 거실 창문의 유리에 ‘짜자자작’ 소리와 함께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균열 너머로,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푸른빛의 공간이 왜곡되는 듯한 무언가가 보였다. 저 너머의 다른 차원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에너지의 근원인가?
작은 푸른 구체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회전하며, 주변 공간을 더욱 격렬하게 뒤틀었다. 서준은 눈앞의 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음을 직감했다. 이건 유령이나 악마 같은 미신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건… 물리적인 재앙이었다.
그때, 회전하던 푸른 구체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눈앞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푸른 섬광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모든 것이 멈췄다.
고주파 진동도, 가구들이 긁히는 소리도, 벽의 흔들림도.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거실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과 떨어진 액자들, 엉망이 된 가구들. 그리고 창문에 선명하게 새겨진 거미줄 균열.
서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혼돈의 정적 속에서, 그의 귀에 이명처럼 윙윙거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그때, 거실 한가운데, 아까 푸른 구체가 사라진 바로 그 공간에서, 희미한, 그러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목소리라기엔 너무나 기계적이고, 동시에 너무나 생명 없는.
**“오류… 감지… 비정상… 에너지… 스파크…”**
서준은 공포에 질려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그의 귓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듯 선명했다. 그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어서 섬뜩한 한 문장을 뱉어냈다.
**“…숙주… 발견…”**
어둠 속에서, 서준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이제 확신했다. 이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그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 ‘무언가’가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한 아파트가 아니었다.
이곳은… 어떤 존재의 실험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