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벽 속의 낡은 숨결

밤 11시, 혜진은 노트북을 닫았다. 오늘따라 마감에 쫓겨 늦은 시간까지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었더니, 목덜미가 뻐근했다. 스트레칭을 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물 한 잔이 간절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오피스텔은 지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혜진이 직접 고른 벽지와 바닥재 덕분에 겉보기에는 깔끔하고 세련된 보금자리였다. 물론 밤만 되면 복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삐걱거리는 소리나, 가끔씩 현관문이 저절로 덜컹이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그건 그냥 ‘오래된 건물의 고유한 현상’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물통을 꺼내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컵 하나가 싱크대 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다행히 스텐레스 재질이라 깨지지는 않았지만, 혜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어휴, 깜짝이야. 내가 또 정신이 없었나.”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컵을 주워 올렸다. 분명히 컵은 싱크대 가장자리가 아닌, 중앙에 잘 놓여 있었다. 혜진은 잠시 갸웃했지만,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얼른 물을 마셨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웹서핑을 좀 하다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불을 끄자 익숙한 어둠이 혜진을 감쌌다. 푹 자야지, 하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 거실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무언가를 건드린 듯한 소리였다.

“뭐야?”

혜진은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도둑인가? 하지만 그럴 리가.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방범창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다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을 켜는 건 왠지 무서웠다. 그냥 무시하고 자자, 하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다음날 아침. 혜진은 개운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갔다. 밤새 뒤척인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커피를 내리려 원두통을 잡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전날 밤, 싱크대 위에 떨어졌던 바로 그 스텐레스 컵. 컵은 마치 누군가 고의로 놓아둔 것처럼, 싱크대 정중앙에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혜진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컵을 주워 올린 다음 어디에 두었더라? 분명히 건조대에 엎어두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면 선반 안에 넣어뒀던가? 하지만 이렇게 싱크대 중앙에 뒤집어 놓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깔끔을 떨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쩐지 오싹했다. 어젯밤 ‘탁’ 하는 소리까지 떠오르며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며칠 후, 이상한 일은 점점 더 빈번해졌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욕실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분명히 잠그고 나간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기도 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펜들이 흩어져 있거나, 보지 않던 책이 펼쳐져 있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하고 자책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해지자 혜진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기괴했던 것은 바로 냉장고였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을 때였다. 분명히 어제 사서 차곡차곡 넣어둔 식재료들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멀쩡히 세워져 있던 음료수 병이 옆으로 굴러다니고, 랩에 싸여 있던 반찬 그릇이 뚜껑이 열린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돼.”

혜진은 차갑게 식어가는 등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다. 침입 흔적도 없었다. 도대체 누가? 아니, 무엇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날 밤, 혜진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거실 쪽에서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오래된 서랍이 열리는 듯한 소리였다. 혜진은 숨을 죽였다. 이내, 찌이익, 찌이익 하는 둔탁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마치 낡은 가구가 바닥을 긁으며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혜진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용기를 내어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살짝 열었다. 어두운 거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탁자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대신,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 스탠드 조명이 저절로 켜졌다. 밝아진 시야 속에서 혜진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오래된 유리컵이 공중으로 떠올라 있었다. 혜진이 직접 산 컵이 아니었다. 이사 올 때부터 주방 한구석에 박혀 있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채 버리지도 못하고 뒀던 낡은 컵이었다. 그 컵은 마치 누군가 잡고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흔들흔들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을 향해 날아갔다.

쨍그랑!

유리컵은 산산조각이 나며 벽에 부딪혔고, 그 파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혜진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더 기이한 것은,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닿는 순간, 마치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파편들이 도로 벽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형체를 복원하는 듯 보였다. 깨진 컵이 다시 온전한 형태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니,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더 오래된* 형태로.

컵은 다시 벽에서 떨어져 나와, 탁자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깨진 자국도, 낡은 흔적도 없었다. 마치 갓 만들어진 새것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컵이 놓이자마자 스탠드 불빛이 ‘탁!’ 하고 꺼졌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혜진은 방문을 닫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물건이 움직이고 부서지는 것을 넘어, *시간이* 뒤틀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컵이 깨지고,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오래된, *잊혀진 시간 속*의 모습으로.

그녀는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컵이 날아가던 모습과, 다시 온전해지던 기이한 광경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아파트가, 이 공간이, 무언가에 의해 뒤섞이고 있었다.

**낡은 시간의 파편들이, 지금, 그녀의 아파트에서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