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노을, 검은 그림자**
잿빛 먼지가 춤추는 세상이었다. 한때 거대한 빌딩 숲을 이루었을 폐허의 도시는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은 철골 구조물 사이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그림자 속을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마른 몸에 너덜거리는 옷가지가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이름조차 희미해진 그를 사람들은 그저 ‘무명’이라 불렀다.
무명의 발걸음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잔해 더미와, 그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위협들. 이 황폐해진 땅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동족이었다. 희미한 허기가 뱃속을 긁어댔지만, 그는 익숙한 고통인 양 묵묵히 참아냈다. 어제는 나뭇가지에 걸린 마른 고깃덩이를 발견했고, 그제는 빗물 웅덩이에서 겨우 목을 축였다. 오늘은 또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시선이 저 멀리, 기괴하게 휘어진 고가도로의 잔해에 박혔다. 한때 수많은 차들이 질주했을 그곳은 이제 거대한 괴물의 척추처럼 꺾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무언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무명은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렸다. 빛을 반사하는 것은 작은 금속 조각일 수도 있고, 누군가 흘린 싸구려 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빛나는 것은 대부분 살아있는 것들의 눈빛이었다.
몇 분을 그렇게 기다렸을까. 그림자 속에서 움직임이 감지됐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흘러내리는 듯한, 끈적이는 형태였다. 무명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저것은… ‘그림자 벌레’였다. 폐허 깊숙한 곳에서 기어 나와 죽은 것들의 잔해를 먹어치우며 번성하는 끔찍한 생명체. 놈들은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의 시체와 섞여 변이되었고,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독액을 품고 있었다.
그림자 벌레는 고가도로 잔해 아래에서 무언가를 끈적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녹색빛을 띠는 작은 주머니였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식량’이라 부르던 귀한 물건. 게다가 놈들이 손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무명은 침을 삼켰다. 저 정도 크기라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 벌레는 덩치가 작아도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단 한 마리뿐이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무명은 허리춤의 낡은 단검을 쥐었다. 녹이 슬고 이가 빠졌지만, 수많은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지켜준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폐허의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오랜 세월 수련으로 단련된 내공이 몸속을 미약하게나마 순환하기 시작했다. 비록 옛날처럼 강렬한 기운은 아니었지만,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를 살아남게 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한 발, 한 발. 무명은 그림자 벌레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발소리는 먼지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듯,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경공술(輕功術)이었다. 예전의 그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데 이 기술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무너진 건물 사이를 오가고, 괴물들의 시야를 피하는 데 쓰일 뿐이었다.
그림자 벌레는 여전히 녹색 주머니에 몰두해 있었다. 끈적이는 촉수를 이용해 주머니를 갉아먹으려는 듯 보였다. 절호의 기회. 무명은 마치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그림자 벌레의 등 뒤에 도달한 그는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놈의 검고 끈적이는 몸통을 갈랐다.
“크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림자 벌레의 몸에서 검은 독액이 뿜어져 나왔다. 무명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독액을 피했다. 독액이 닿은 바닥의 콘크리트가 순식간에 지글거리며 녹아내렸다. 위험했다.
하지만 놈은 쉽게 죽지 않았다. 몸이 반으로 갈라진 상태에서도 촉수들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무명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잔해 속에서 또 다른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무명이 경고를 무시하고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이었다.
“젠장.”
무명은 나직이 욕설을 읊조렸다. 여섯 마리의 그림자 벌레가 추가로 나타났다. 모두 덩치가 작지만, 끈적이는 독액과 수많은 촉수들은 그 어떤 무예가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고작 식량 주머니 하나를 얻으려다 목숨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잠시 후퇴를 고민했다. 그러나 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요동쳤다. 사흘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무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순간적으로 선명해졌다. 그의 내공이 온몸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눈에 그림자 벌레들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독액을 뿜는 타이밍, 촉수를 휘두르는 궤적. 모든 것이 보였다.
“그래, 이게 내 마지막 패다.”
그는 낮게 읊조리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몸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한때 강호(江湖)를 뒤흔들었던 ‘청월검법(靑月劍法)’의 잔재였다. 검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검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 그림자 벌레가 끈적이는 촉수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무명은 몸을 낮추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종잇장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단검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놈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놈은 축 늘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나머지 다섯 마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독액을 분사하는 놈, 촉수를 휘두르는 놈. 무명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며 그림자 벌레들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는 더 이상 후퇴하지 않았다. 단검은 마치 살아있는 혼을 가진 듯, 그의 손에서 춤을 추었다. 놈들의 끈적이는 몸통을 가르고, 촉수를 끊어내며, 기생충 같은 핵을 찾아 정확하게 꿰뚫었다.
“하압!”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무명이 온몸의 내공을 단검 끝에 집중시켰다.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마지막 남은 두 마리의 그림자 벌레가 동시에 독액을 뿜어냈다. 무명은 눈을 감지 않고 그 모습을 똑똑히 응시했다. 독액이 그의 얼굴에 닿기 직전, 그는 몸을 비틀며 회전했다. 마치 거대한 팽이처럼, 그의 몸을 중심으로 단검이 원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파앗!
두 마리의 그림자 벌레가 동시에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검은 독액이 사방으로 흩뿌려졌지만, 무명에게는 한 방울도 닿지 않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후들거렸고, 내공은 거의 바닥났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림자 벌레들의 잔해를 넘어 녹색 주머니로 향했다. 끈적이는 독액이 바닥에 흥건했지만, 주머니는 다행히 멀쩡했다. 흙먼지로 뒤덮인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집어 든 무명은 내용물을 확인했다. 마른 육포였다. 그것도 꽤 많은 양.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을은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폐허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잿빛 그림자와 검은 그림자 벌레들의 잔해뿐. 오늘 밤은 또 어디에서 몸을 숨겨야 할까. 그리고 내일은, 또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무명은 육포 주머니를 품에 안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저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는 것과 같았다. 끝없는 황폐함 속에서, 그의 생존기는 오늘도 계속될 터였다.
